성찰 없는 평론가를 보면
별장을 가져 보는 것이 꿈이다.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현재 시점에서 가능하지 않다.
정년의 나이가 지났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어찌 보면 현실에 매여 있는 삶이다. 그렇다고 별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휴양림을 이용하면 내것이나 다름 없다.
주작산 자연휴양림에 있다. 강진만이 보이는 곳이다. 휴양관2층 작은 방에서 새벽을 맞았다. 자동차 소리는 일체 들리지 않는다. 이름 모를 갖가지 새소리만 들린다.
어제 목포 게스트하우스에서 일박 했는데 타지라 그런지 잠을 못 잤다. 그 다음날은 잠을 잘 자게 되어 있다. 휴양림에서 아침도 그랬다.
휴양림에서 눈을 떠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안되었다. 여명이 밝아 왔다. 휴양림에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자리를 박차고 무조건 산으로 갔다. 찬란한 아침을 맞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 도시가 그렇다. 세상에 사람만 있는 것 같다. 생존경쟁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곳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서로 미워하고 서로 증오한다는 것이다.
이념이 달라서 미워한다. 같은 진영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워한다. 미움으로 시작해서 미움으로 끝나는 것 같다. 대체 이 싸움은 언제나 끝나는 것일까?
미워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담벼락에 커다랗게 써 놓는다고 해서 그 사람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미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한다. 미움과 혐오와 증오를 넘어 배제한다. 이쯤 되면 폭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전쟁광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증오와 적개심을 부추기게 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증오심과 적개심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념에 집착하게 되면 혐오와 배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편이 아니면 혐오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한다면 폭력이다.
사람들은 매일 언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에스엔에스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이 설정되면 하이에나가 된다. 진보는 보수가 대상이 되고, 보수는 진보가 된다. 마치 사색당파를 보는 것 같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그 결말은 어떤 것일까? 죽음이다.
사색당파로 얼마나 사람이 죽었을까? 단지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고 유배되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사화는 되풀이 되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이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철천지 원수를 만들어 죽고 죽이는 악업을 저질렀다.
요즘 뉴스를 보지 않는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에스엔에스는 보지 않을 수 없다. 에스엔에스에서는 자칭타칭 평론가들이 많다. 그들이 가끔 툭툭 던지는 글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평론가들에게서 분노를 본다. 어쩌면 정의로운 분노이다. 어쩌면 거룩한 분노이고 자비의 분노일 수 있다. 그러나 분노가 일상화 되면 분노에 사로잡힌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이는 분노하라고 말한다. 분노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내면 세상은 바뀔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일상화 되면 설득력을 잃는다. 더구나 증오와 혐오가 되어 배제하면 폭력이 된다.
누구도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정의를 위한 것일지라도 폭력이 수반되면 정당성을 잃게 된다. 언어폭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요즘 가능하면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뉴스도 보지 않기 때문에 쓸 것도 없다. 그럼에도 에스엔에스에서 평론가들로부터 소식을 듣는다. 때로 분노도 하지만 때로 그러려니 한다. 왜 그런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믿기 때문이다. 연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안다면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미움의 대상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 역시 업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나를 바꿀 것인가? 먼저 자신의 성찰이 있어야 한다.
평론가는 남의 이야기를 한다. 남 이야기 하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이상적인 평론가는 자신도 성찰하면서 남 이야기도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말하는 주의나 주장은 들어 줄만 하다.
조용한 휴양림의 아침이다. 오늘도 하루일정이 시작된다. 먼저 땅끝으로 간다. 땅끝에서 북상하며 미황사, 대흥사 등 들러야 할 곳을 들를 예정이다. 모처럼 맞은 휴양림에는 주의와 주장도 없고, 이념과 이데올로기도 없다.
뉴스를 보지 않으니 소위 정치평론가들의 소리도 듣지 않는다. 다만 에스엔에스에서의 평론들은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평론가도 평론가 나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증오와 혐오와 배제를 말한다면 이는 폭력이다. 그러나 자기반성도 하면서 평론한다면 그런 주의나 주장은 들어 줄만 하다. 자신의 성찰 없이 증오와 혐오와 배제로 일관하는 평론가를 멀리한다.
2022-06-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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