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양애깐 화분에서 고향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21. 09:23

양애깐 화분에서 고향을

 

 

이곳 저곳에서 소들이 울부짓는다. 소똥 냄새가 풀풀 나는 고향이다. 언제 똥 냄새는 없어질까? 비록 똥냄새 나는 고향마을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다.

 

 

고향마을에 가면 둘러 보아야 할 곳이 있다. 거대한 고분이 있는 곳이다. 사촌 형님들 말에 따르면 장군봉이었다고 한다. 장고봉이었다고도 말한다. 전방후원형 고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예덕리 고분군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4-5세기로 보고 있다.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않은 시기에 지방 호족의 무덤으로 본다. 그때 당시에는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드는 시기였기도 하다.

 

지방에 거대한 무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중앙집권체제가 아니었음을 말한다. 작은 나라로 할거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국가라면 지방호족이 왕릉과도 같은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함평 예덕리에 있는 고분군은 함평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유력한 토호 세력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번에 예덕리 고분군을 보면서 고인돌을 보았다. 예전에도 보았지만 이번에 다시 보게 되었다. 작은 고인돌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고인돌 형태이다. 받침 바위가 있고 그 위에 넓다란 큰 바위를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고인돌 바위 색깔이 예사롭지 않다. 시커멓고 단단한 재질의 화강암이다.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인돌은 누가 만들었을까? 아득한 옛날 어느 때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고분과 고인돌은 마을이 생기기전에 있었던 것이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수백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분이 만들어진 것은 1500년전이다. 고인돌은 더 오래 되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고분은 산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한 전설은 있어서 장군봉 또는 장고봉이라고 불리워졌던 것 같다. 고분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일제시대 때이다. 최근 90년대에 발굴이 이루어져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골집에 가면 꼭 확인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호랑가시나무이다. 호랑가시나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2012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소감을 예전에 마을어귀에 많이 있었으나 누군가 자꾸 채취해 감에 따라 이제 호랑가시나무가 보기 힘들어 졌고 희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 심어 놓은 것이라 한다.” (인생의 2막을 살아가는 사람, 2012-07-09)라고 적어 놓았다.

 

 

해마다 제사 때 고향마을에 가면 호랑가시나무가 잘 크는지 확인했다. 이 지역서만 자생하는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누가 캐갈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십년이 지난 현재 호랑가시나무는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호랑가시나무가 크는 것을 보면 점점 가속이 되는 것 같다. 일년만에 보니 작년과는 완전하게 다른 모습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서 마음껏 성장한 것이다. 거의 지붕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목대도 두꺼워 졌다. 이제 안심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누가 캐갈 수 없을 것이다. 시골집에는 천연기념물이 자라고 있다.

 

 

일년만에 다시 찾은 시골집에 변화가 있다. 석류나무가 죽은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 석류꽃이 피었으나 가지가 마른 채 죽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나무가 죽은 것을 보니 나무무상을 느꼈다.

 

집 뒤켠에서 하나의 식물을 발견했다. 다년생 풀처럼 생긴 식물이다. 이곳저곳에서 자생하고 있는데 생명력이 왕성해 보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파가서 사무실에 놓고자 한 것이다.

 

 

이 식물 이름은 무엇일까? 백부 사촌인 큰누님에게 물어 보았다. 큰누님은 근처마을에 살고 있다. 누님은 양핵관이라고 했다. 윤핵관이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양핵관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아마 내가 잘못 들었을 것이다.

 

누님에 따르면 봄에 새순이 나면 잘라서 음식으로 먹는다고 한다. 마치 봄에 나는 원추리 새순을 잘라 먹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마치 죽순처럼 대가 있고 잎파리는 질긴 것이 원예용으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삽을 이용하여 식물을 채취했다. 다량의 흙이 달려 나왔다. 고향의 흙이다. 이를 사무실 화분에 옮겨 심고자 했다. 그렇다면 정확한 식물이름은 무엇일까?

 

꽃이름 검색 어플 모야모가 있다. 사진을 올려 놓으니 5분도 안되어서 댓글이 달렸다. 식물이름은 양하(蘘荷)였던 것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제주와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나는 다년생 풀이라고 한다.

 

양하의 또 다른 명칭은 양애라고 한다. 그런데 더 검색을 해보니 어느 블로그에서 제주도에서는 양애 또는 양애깐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의문이 풀렸다. 큰 누님이 말한 양핵관은 양애깐이었던 것이다. 내가 잘못 알아 들은 것이다.

 

양하는 전라도 말로 양애깐이라고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열대 아시아 원산의 여러해살이풀이라고 했다. 또한 양애깐은 식용으로도 사용되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른 봄 땅에서 돋는 연한 새순을 한 꺼풀씩 벗겨 쌈을 싸 먹기도 하고 잎이 피기 전의 줄기로는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가을에는 작은 죽순처럼 올라오는 꽃봉오리 겉잎들을 벗겨 내고 안쪽 연한 잎을 샐러드에 넣거나 끓는 물에 데쳐 참기름·깨소금·청장·소금으로 양념해서 나물로 무치면 맛이 아주 독특하다. 김치 장아찌로 담가도 맛이 좋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양애깐은 전라도에 나는 자생식물로서 여러해살이 풀이다. 식용으로도 사용되지만 나에게는 관상용으로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한삽 흙과 함께 퍼서 비닐봉지에 담았다. 양애깐을 차에 싣고 왔다.

 

 

양애깐을 화분에 심는 작업을 했다. 먼저 꽃집에서 흙을 사왔다. 거름기가 있고 영양이 풍부한 흙이다. 물이 잘 빠지도록 화분 바닥에는 크고 작은 자갈을 깔았다. 그 위에 사 온 흙을 깔고 그 위에 고향 흙을 깔았다. 그리고 양애깐을 심었다. 또 다시 사온 흙을 덮었다. 이렇게 해서 양애깐 화분이 하나 탄생되었다. 양애깐은 잘 자랄 수 있을까?

 

 

양애깐은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다. 고향집 뒤켠에서 자생하고 있는 것을 흙과 함께 가져 온 것이다. 어쩌면 고향의 일부분이 옮겨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양애깐 화분에서 고향을 본다.

 

 

2022-06-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