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득량만이 바라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20. 07:43

득량만이 바라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대체로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 중에는 여성도 있다. 여자법우들을 말한다.

여성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만나는 사람 중에 반은 여성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작은 법회모임 법우들이다. 2004년 이후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으니 18년 되었다. 불교교양대학 동기모임을 말한다.

이 세상의 반은 여자이다. 남자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여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반은 남자가 될 것이다. 욕계중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색계나 무색계의 존재라면 성이 없다. 이를 중성 또는 무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부처님 가르침은 중성 또는 무성을 지향하는 것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욕망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욕계를 떠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선정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초선정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S45.8)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kama)을 여의라고 했다. 까마는 일반적으로 오욕락을 말하지만 특히 성적인 쾌락을 말한다. 선정삼매에 들면 오욕락 보다 더한, 비교가 되지 않는 즐거움(sukha)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탐욕, 분노 등 다섯 가지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떠났을 때 최상의 기쁨과 행복, 평온을 맛 볼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성을 초월하라고 했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
수행승들이여, 여인이 안으로 여인의 본성, 여인의 행동, 여인의 외관, 여인의 욕망, 여인의 소리, 여인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녀가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남자의 본성, 남자의 행동, 남자의 외관, 남자의 교만, 남자의 욕망, 남자의 소리, 남자의 치장에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한다. 그녀는 거기에 탐닉하고 거기에 환희하여, 밖으로 결박을 구한다. 그녀에게 결박을 조건으로 안락과 쾌락이 생겨나면, 그녀는 그것을 구한다. 수행승들이여, 여성성에 탐닉하는 뭇삶은 남자에게 결박된다. 이와 같은 여인은 여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A7.51)

이와 같은 가르침은 남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요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여성답게"라는 말과 "남성은 남성답게"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성에 집착하지 않는다. 성을 여의려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은 여성답게라든가, 남성은 남성답게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모두가 중성 또는 무성이 되는 것이다. 스님들이 머리 깍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페이스북 친구도 해당될 것이다.

 


6
18일 오후에 페이스북 친구(페친)를 만났다. 페이스북 활동하다 보면 수많은 친구가 있는데 그 중 한사람이다. 만날까말까 고민했다. 상대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전달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지 5년 되었다. 2017년부터 올린 것이다. 이전에는 블로그에만 글을 올렸다. 페이스북은 실시간 소통이 특징이기 때문에 장문의 글은 맞지 않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어서 긴 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리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긴 글은 인기가 없다. 사진이나 짤막한 글 등 감각적인 글이 환영 받는다. 그런데 긴 글임에도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공감하며 댓글까지 달아 주는 사람이 있다. 더 나아가 선물까지 보내 주었다. 이런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다. 시간 되면 찾아 보기로 했다. 보성에 사는 페친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다.

여성법우들이 있지만 개별적으로 만나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세 명 이상 모임이 되어야 만난다. 그럼에도 보성 페친을 만난 것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것 이다. 글을 읽어 준 감사의 마음과 먹을 것 등을 보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문자 메세지를 보냈을 때 페친은 흔쾌히 수락했다. 대개 이름 있는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기 마련이다. 그에 따라 상처도 크다. 이에 반하여 면담을 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으로 본다.

우리 속담에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해석한 바에 따르면, 오는 사람 막지 않는 것은 자비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자비심이 있다면 막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생각한 바로는 집착과 관련 있다. 나를 싫어서 떠나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오는 사람 막지 않는 것은 자비의 마음이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것은 무집착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초월 했을 때 이성간의 만남은 부담 없다. 법회 모임에서 여성법우를 여성으로 보지 않고, 남성법우를 남성으로 보지 않는 이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보성 페친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라고 본다.

 


페친은 밀집모자에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득량만이 바라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감동적인 이야기는 태양광 설치에 대한 것이다. 마을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려는 업체와 싸워 승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삭발투쟁도 했고 군민 유권자의 대부분으로부터 서명까지 받았다고 한다. 마침내 조례를 바꾸어 마을을 보호 했다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 전원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막상 전원생활을 하게 되면 상상했던 것과 다른,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골생활을 잘 하려면 원주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을 텃새가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페친은 만나는 사람마다 아짐, 아짐하며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는 것이다.

 


페친에게서 삶의 활력을 보았다. 마을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로서 모습도 보았다. 마을 환경을 지키기 위해 투쟁도 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모습도 보았다. 벽화 그리기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마을을 지나는 도로가 있다. 도로에 의해서 마을이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 졌는데 연결 지하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페친은 현재 지하통로 벽에 벽화를 그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과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다. 미술 전공이라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이발소 그림 같은 것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과일을 수확하는 장면, 복숭아꽃 등 일종의 생활벽화라고 말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마을회관 주변 담에도 그릴 것이라고 한다.

 

 


페친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꿀과 올리브유, 와인을 선물 했다. 페친은 차 받침대를 선물했다. 도자기로 된 것이다. 직접 구워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득량만이 바라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세 시간 가량 보냈다. 페이스북에서 일상을 소개 하고 있어서 대충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만 못하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살아가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늘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여성성을 초월한 여장부로서 모습을 보았다.


2022-06-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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