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한다면
그제 대단히 분노했다. 나의 제안이 거절 당했기 때문이다. 이를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분노의 불길에 사로잡힌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집착과 자만과 견해와 관련 있을 것이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8강이 끝났다. 청년붓다는 감이당에서 진행하던 강좌로 유료회원에 한정된 것이다. 대면과 비대면으로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못 본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튜브 비공개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권한이 부여 되었다.
청년붓다 강좌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가량 진행 되었다. 모두 다 들었다. 그리고 장문의 후기를 모두 다 남겼다. 이에 대해서 '완주했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그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강연자를 만나보는 것이다. 그러나 전화번호도 모르고 메일도 모른다.
후원할 때 알게 된 오창희 선생에게 메일을 보냈다. 고미숙 선생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소액이지만 매달 정기적 후원도 하고 있고 더구나 청년붓다 8강까지 후기를 남겼기 때문에 충분히 면담요청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거절당했다.
오창희 선생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고미숙선생과 말벗이 되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다. 또한 수십년 병고를 이겨낸 의지의 사람 정도로 알고 있다.
오창희 선생의 메일은 완곡했다. 면담 거절 이유에 대하여 절제 있고 품위 있게 써 놓았다.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메일 내용은 이렇다. 후기를 쓰는 등 관심 보여 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직접적인 만남은 어색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만 세미나를 통한 만남은 가능하다고 했다. 공식적인 만남은 허용하지만 비공식적인 사적 만남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 졌다.
메일을 받고 분노했다.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강연에서 말하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8강 강연 말미에 "여러분과 좋은 도반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마무리한 바 있는데 이 말과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입니다." 라는 말과 "기대가 무너졌습니다."라는 과격한 표현을 썼다.
면담 요청이 거절되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말과 행위가 일치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명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나의 스펙이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아닌지도 생각해 보았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심지어 남성혐오가 있는 페미니스트가 아닌지 의심 했다. 더 나아가 트러블메이커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했다. 최악은 스토커일 것이다.
한번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자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것은 글로서 알리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까발리는 것이다. 그리고 후원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당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의 상식에 판단했을 때 용납이 안되었다. 오래전부터불가에서는 “오지 않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지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만족하지 못해 떠나는 사람이 있어도 붙잡지 않음을 말한다. 이를 자비와 무집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이 찾아 오는 것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혼자 있고 싶다. 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것은 혼자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이 몸에 베어 있다 보니 모임도 별로 없고 누군가 찾아 온다고 했을 때 일단 거절한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어느 모임이든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또한 찾아 오는 것도 환영한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불교공부를 한 영향이 크다. 경전을 보면 찾아 가서 배우는 이야기가 많다. 또한 찾아 왔을 때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망갈라경(축복경, Sn.2.4)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6)
구도자는 찾아 가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망갈라경에서는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Stn.266)이라고 했다. 이런 태도만 있다면 누구에게든지 가르침을 청할 수 있다. 문제는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
방문을 요청했을 때 거절 당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셀럽인 경우가 그렇다. 아무래도 유명인이기 때문에 시간도 없고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 클라스(級)가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만나 주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만나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멀리서 찾아 간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말은 아마도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으로 본다.
그제 분노 때문에 치를 떨 정도였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참을 수 없었다. 다음날 감이당을 방문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생각나는 사람은 한사람 밖에 없다. 이경아 선생이다. 세달 전에 무턱대고 방문 했을 때 처음 만났다.
감이당에 가면 고미숙 선생을 만날 줄 알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후원도 하고 활동하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후원도 하고 청년붓다도 수강했다. 그리고 후기도 여덟 편 남겼다. 이쯤 되면 만날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 당했다. 이에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이경아 선생을 만났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이경아 선생은 감이당 대중지성의 담임을 맡고 있다. 모두 일곱 개의 대중지성 모임이 있는데 매주 화요일에 열리는 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신에 대한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신을 사유하는 것이다.
홈페이지를 보니 각 요일의 정원은 24명이다. 총 40주 과정이다. 비용은 만만치 않다. 구성원은 20부터 80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책을 읽고토론하는 모임이다.
대중지성 모임에 참여하면 고미숙 선생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생업이 있는 사람은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대상이 된다. 그래서 고미숙 선생이 늘 말하는 ‘백수모임’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고미숙 선생이 매주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다. 글을 발표회 하는 날에 참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의 스케줄이 있을 때 질의응답을 통해서 대화를 하는 것은 가능한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고미숙 선생과 개인적인 대화는 가능하지 않은 것 같으로 보인다.
이경아 선생과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대중지성방의 담임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보았다고 한다. 도중에 그만 두는 사람도 많은데 한결같이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나이 든 남성으로 사회에서 잘 나가던 사람, 한가락 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경아 선생에 따르면, 많이 배우고 지위도 있는 사람들이 뛰쳐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고미숙 선생이 만나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만 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심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케이스에 해당될지 모른다.
이경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편으로 고미숙 선생의 처신이 이해 되었다. 또 한편으로 나의 행위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고미숙 선생은 바쁜 사람이다. 강연 요청이 들어 오면 강연해야 한다. 불러주면 어디든 갈 것이다. 전국을 대상으로 뛰는 것이다. 또한 감이당 사람들도 챙겨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책도 읽고 책도 써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듯이 불만을 토로한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최상의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있다면 블로그에 글 쓰는 것 밖에 없다. 이런 것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려 한다면 자만일 것이다. 더구나 만나 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면 집착일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견해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착과 자만과 견해에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미숙 선생과 만남은 포기했다. 후원이고 뭐고 다 끊어 버릴까도 생각했으나 그만 두었다. 고미숙 선생에게는 잘못이 없다. 나의 마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세상에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 있지만,
여기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S1.34)
상윳따니까야 ‘않음의 경(Nasantisutta)’(S1.34)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는 세상의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고 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을 예로 들 수 있다.
미니스커트 입은 여인을 보고서 욕망이 발동했다면 누구 책임일까?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의 책임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욕망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욕망으로 보았을 때 오염된 마음으로 보는 것이 된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를 탐욕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 마음이 탐욕으로 오염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미숙 선생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나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 마음은 집착과 자만과 견해에 가득 찬 것이다. 나의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공자의 인생삼락이 있다. 세 가지 중에서 배움과 벗에 대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人不知而不愠 不亦君子乎)"라는 말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군자라면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실망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한다면 군자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트러블메이커가 되고 최악의 경우 스토커가 된다.
스토커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거의 대부분 광팬에서 생겨난다. 자신에게 관심 보여 주지 않았을 때 스토커가 된다. 무시당했다고 느꼈을 때 스토커의 길로 가게 된다.
나도 이번에 스토커가 될 뻔 했다. 비난의 글을 쓰면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정아 선생과 대화하면서 멈추었다. 무엇보다 경전의 힘이다.
초기경전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가 수없이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아 또는 비아에 대한 가르침이다.
정형구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갈애에 대한 것이다. 이를 집착으로 보아도 된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은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것은 자만에 대한 것이다. 어떤 자만인가?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을 말한다. 특히 지위와 부와 학력이 있는 자의 자만을 말한다. 이를 태생의 자만, 배움의 자만, 부자의 자만으로 설명한다. 이와 같은 자만이 있을 때 "내가 누군데? 감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견해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 사상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나의 지혜가 형편없음이 드러났다. 경계에 부딪쳤을 때 산산조각난 것이다. 나를 알아달라고 인정투쟁한 것이다. 되돌아 보니 그것은 집착과 자만과 견해와 관련 있다. 나의 마음이 불선법에 오염된 것이다.
진정한 인정투쟁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자가 말한 것처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 것이다. 초기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만족을 모르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을 조건으로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욕심이 없으면서 욕심이 없다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만족할 줄 알면서 만족할 줄 안다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A8.30)
부처님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설령 자신이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해도 알릴 필요도 없고 알아달라고 인정투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어쩌면 인정받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언젠가는 글쓰기를 멈추어야 할 것이다. 특히 욕망에 따른 글쓰기를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인정투쟁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오염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분노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분노에 오염되지 않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 고미숙 선생은 아무 잘못이 없다. 결국 오염된 나의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어제 감이당 갔을 때 선물을 가져 갔다.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양농수산물 시장에서 천도복숭아 한박스를 샀다.
감이당은 4층짜리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2층은 감이당이고 3층은 남산강원이다. 2층에는 대중지성 공부방이 있고, 3층에는 청년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3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마침 남녀 청년 두 명이서 점심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3층에서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도 있다는 것이다. 하루 세 끼를 이곳에서 먹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다. 한끼에 2,500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감이당에서 공짜는 없다. 이번 청년붓다 8강도 청년들은 돈 내고 들어야 했다. 다만 일반사람들에 비하면 반값이다.
청년들은 잠은 다른 곳에서 잔다. 강원은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연다고 한다. 감이당은 남산입구에 있는 출가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속으로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도심으로 출가하는 것이다. 현재 15명 가량 된다고 한다.
청년들을 후원하고 있다. 방문할 때마다 먹을 것을 들고 간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공부하는 곳에는 먹을 것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주방의 칠판을 보니 보시물품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학인은 굶지 않는다.”라는 사실이다. 공부하면 누가 도와주어도 도와 주게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제는 분노했고 어제는 자신을 되돌아 봤다. 공부가 부족함을 느낀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그러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스토커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경아 선생을 만나고 멈추었다.
고미숙 선생을 언젠가 만날 것이다. 아마 7월 9일이 되기 쉽다. 옥복연 선생에 따르면 그날 사단법인 불교아카데미에서 북콘서트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날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된다.
잘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거절에 능숙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한다면 공부가 덜 된 사람이다.
2022-06-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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