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인생을 즐기며 살자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22. 07:18

인생을 즐기며 살자고?


구십세 시대이다. 조사 소식을 들으면 구십대 부모가 많다. 본인들 나이가 있으니 부모의 나이가 구십세가 되는 것이다. 나는 구십세까지 살까?

장수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축복이다. 그러나 최근 통계에 따르면 80세 살기도 쉽지 않다. 70대 중반 이후가 되면 생존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간다. 오래 살아 봤자 백년이다. 먹고 자고 아픈 시간 빼면 많지 않다. 옆에서 죽는 사람을 보면서도 자신 만큼은 결코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삶의 교만이다. 이뿐만 아니다. 자신만큼은 늙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젊음의 교만이다. 자신 만큼은 병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건강의 교만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교만으로 살아간다. 삶의 교만,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행복의 교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삶은 죽음에 종속되고,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행복은 불행에 종속되고 만다.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자만하는 순간 즐기는 삶이 되기 쉽다. 즐겨서 남는 것이 없다. 즐기는 삶은 불선업이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즐기는 삶은 욕망의 삶, 탐욕의 삶이 되기 쉽다. 그런데 욕망이나 탐욕은 불선법이라는 것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불선업이 된다. 한평생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한평생 불선업을 지은 것이 된다. 장수하면 장수할수록 불선업의 삶이 되기 쉽다. 어른 들에게 "오래오래 즐기며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오래오래 불선업을 지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즐기는 삶보다 공덕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선업이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에 대한 것이다. 선법은 선업의 토대가 된다. 오래오래 살수록 선업은 늘어갈 것이다. 이렇게 공덕이 되는 삶을 살 때 장수는 축복이 된다.

오래오래 살면 살수록 악업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축복이 되는 삶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즐기는 삶을 살기 때문에 악처를 피할 수 없다. 설령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지혜가 없다면 불선업이 되는 삶이 되기 쉽다.

사람들은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살고자 한다. 하지만 탐욕과 분노로 평생 살았다면 다음생은 악처이기 쉽다. 대부분 아귀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한평생 인색하게 산 것이다. 또한 오로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산 것이다. 오로지 눈과 귀, , , 몸으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아귀가 되기 쉽다. 보시도 없고 지계도 없고 수행도 없는 삶은 악처에 나기 쉽다.

육십대가 되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살아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열심히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할까?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다음 생은 없다고 본다면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면 된다. 그러나 정견을 가진 자라면 즐기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즐기는 삶이 불선업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공덕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할 것이다.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이다.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마음은 틈만 나면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본래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해도 마음은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그래서 늘 감각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는 불선업의 삶이 되기 쉽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해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욕망으로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취온의 존재는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욕망은 항상 괴로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어남 자체가 괴로움이다.

부처님은 태어남이 괴로움이라고 했다. 늙고 병드는 것이 괴로움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는 말은 좀처럼 이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이 오취온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 당연히 태어남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며 고성제부터 설했다. 부처님은 왜 고성제부터 설했을까?

집성제가 원인에 대한 것이라면 고성제는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인과법이다. 부처님은 원인과 결과를 설했다. 부처님은 당연히 원인에 해당되는 집성제부터 설해야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반대로 결과에 해당되는 고성제부터 설했다. 부처님은 왜 거꾸로 설했을까?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라는 사실을 먼저 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은 오온에 집착되었기 때문이다. ,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취온적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오취온적 존재가 괴로움인 것을 선언한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a
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56.1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우리가 오취온적 존재라면 우리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부처님은 사고와 팔고를 언급하며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괴로운 존재인 것을 먼저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과에 해당되는 고성제부터 먼저 설했다.

입만 열면 거짓말 한다고 말한다. 범죄자들은 틈만 나면 거짓말한다는 것이다. 법정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청문회 할 때도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법정이나 청문회장에서는 선서를 한다.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취온적 존재는 어떠할까? 아마 틈만 나면 감각을 즐기려 할 것이다. 틈만 나면 음행을 하려 하고, 틈만 나면 술을 마시려 하고, 틈만 나면 먹으려고 하고, 틈만 나면 TV나 유튜브를 즐기려 하는 것이다. 한평생 감각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한평생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면 한평생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오래오래 살면 불선업만 짓게 된다. 팔십세 구십세를 살아도 불선업만 짓는 것이 된다.

저세상이 없다고 본다면 즐기는 삶을 살아도 될 것이다. 인생이 한번뿐이라면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아도 된다. 그러나 저세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확률은 반반일 것이다.

저세상이 없을수도 있고 있을수도 있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저세상이 있다고 내기 거는 것이 낫다. 저세상이 없다고 생각하여 즐기는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저세상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악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현자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M60)

 


이러한 논리는 업과 원인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저세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업보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 원인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외도로 보면 된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은 저세상도 있고, 업보도 있고, 원인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정견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저세상은 있을 수밖에 없다. 업보도 있을 수밖에 없고, 원인도 있을 수밖에 없다. 연기법은 상호의존적이고 조건발생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법칙에 따른다.

이제까지 만난 최악의 단멸론자가 있다. 그는 수학자이다. 많이 배우고 지위가 있는 그는 불교닷컴에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어린아이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다."라는 취지로 글을 썼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윤회는 의미 없는 것이 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 될까? 현세를 즐기는 삶이 될 것이다.

만약 그가 알콜 중독자나 마약중독으로 살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정신이 흐리멍덩한 채로 살았기 때문에 정신이 약한 자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와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음생의 과보를 자금 여기에서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런가? 이는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M60)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고향 다녀 왔다. 12일 일정을 가졌다. 6 18일과 19일 양일 동안 백장암, 해남, 보성, 함평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함평에서 제사를 마치고 난 다음 마무리 일정은 국립5.18묘지를 순례하는 것으로 했다.

 


5.18
묘역은 한가했다. 지난 5월 김동수 열사 추모제 때 단체 참배하려 했으나 교통문제 때문에 불발되었다. 이에 나홀로 참배 했다. 김동수 열사 묘역도 찾았다.

 


조형물을 보았다. 하나는 '무장항쟁군상'이다. 설명문에 따르면 "불의에 저항에 총을 들고 항쟁하던 시민군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했다. 또 한가지 조형물은 '대동세상군상'이다. 이는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며 질서와 치안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1980 5월 당시의 대동세상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했다.

 


묘역에는 상징탑이 있다. 두 손바닥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 부분 글씨를 보니 '5.18민중항쟁추모탑'이라고 쓰여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나는 왜 홀로 묘역을 찾았는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마지막날 도청에서 결사항전한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기 때문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진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살행을 한 것이다.

 


누구나 오래 살고자 한다. 그러나 즐기는 삶이 되면 오래 살수록 악업만 늘어난다. 장로가 장수축원하는 것은 오래 살아서 선업공덕을 많이 지으라는 것이다. 보시, 지계, 수행의 삶을 말한다.

구십세 백세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팔십세 살기도 쉽지 않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짧고 굵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묘역에 묻힌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여 현세를 즐기는 삶으로 보낸다면 비난 받을 것이다. 누군가 인생을 즐기며 살자고 말한다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보아야 한다.


2022-06-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