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혼한 전처 보듯 현상을 관찰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28. 15:52

이혼한 전처 보듯 현상을 관찰하면


그 동안 너무 모르고 살았다. 맛지마니까야를 처음부터 읽어 보니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이 니까야에 있었음에도 모르고 산 것이다. 운명에 대한 것도 그렇다.

흔히 업장소멸이라는 말을 한다. 사고가 났을 때 "그만 하길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전생에 지은 업장이 소멸되었다."라고 말한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 고통, 비탄, 슬픔이 전생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라고 말한다. 과연 이 말은 불교적일까?

맛지마니까야 101번 경에 전생업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이 전생에 지은 행위 때문에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지금 이와 같이 고통스럽고 아프고 찌르는 듯한 느낌만을 느끼는 니간타들은 전생에 악한 행위를 한 자들이다."(M101)

 


부처님은 자이나교도들이 고행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육체적 고행을 통해서 전생의 악업을 소멸시키는 것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고행이 왜 잘못된 것인가? 지독한 고행으로 전생의 악업을 소멸시키기는커녕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겪는다면 전생에 악한 행위를 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전생에 악한행위를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전생에 선한 행위를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없다. 전생에 행한 알 수 없는 악업을 소멸하기 위해서 고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마치 벽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찢는 행위와 같다. 그렇게 한다고 전생의 악업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고행으로 인하여 괴로운 느낌이 발생했다면 고행은 자기 학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학대해서 업장소멸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다. 고행해서 죄가 사해질 수 있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독한 고행으로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만 맛볼 것이다. 자이나교의 원리가 그렇다.

부처님은 또 한가지 놀라운 선언을 한다.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이다.

"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이 주재자의 창조적 활동 때문에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지금 이와 같이 고통스럽고 아프고 찌르는 듯한 느낌만을 느끼는 니간타들은 전생에 악한 주재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들이다."(M101)

영화 밀양에서 어느 목사는 자신을 유혹하는 여인을 보고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했다. 신의 뜻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뜻대로 할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즐거움이나 괴로움도 신의 뜻으로 볼 것이다.

모든 것을 신에게 전가해 버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특히 괴로움 느낌이 발생되었을 때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런 신은 악신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악한 주재자"(M101)라고 했다.

지금 행복한 자가 있다. 지금 여기에서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자를 말한다. 행복한 느낌에 대하여 전생의 선업을 원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괴로운 자가 있다.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전생의 악업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느낌은 전생의 선업에 대한 것도 아니고 악업에 대한 것도 아니다. 느낌은 오로지 접촉에 의해서 발생된다. 삼사화합촉에 의하여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느낌에 대하여 전생 탓으로 돌린다면 숙명론자가 된다. 신의 뜻으로 돌리면 신의론이 된다.

느낌은 전생의 선업이나 악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숙명론자들은 "무릇 어떤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경험하는 모든 것은 전생의 업에 기인하는 것이다."(M101)라고 말한다. 이렇게 숙명론자가 된다.

자동차 사고가 난 자가 있다. 자동차는 부서져서 손해가 막심하다. 몸도 다쳐서 아프다. 이런 사고에 대하여 "그만 하길 다행입니다."라든가, "더 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업장소멸입니다."라고 말 했을 때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이나교 교리를 말하는 것과 똑 같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잘못된 것이다.

느낌은 과거 행위의 결과 때문이 아니다. 느낌은 현재 행위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느낌은 접촉에 의해서 발생되었음을 말한다. 접촉으로 괴로운 느낌이 생겨난 것이다. 자동차 접촉사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느낌도 과거 전생의 업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는다. 과거 전생에 일어난 느낌은 과거에 일어난 것으로 끝난다. 과거 전생의 느낌이 현생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한번 생성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과거 느낌이 현생에 나타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 손바닥을 부딪치면 ""하고 소리가 난다. 소리는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 그러나 사라질 때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느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느낌은 조건에 따라 발생된다. 사라질 때는 조건없이 그냥 사라진다. 매번 새로운 느낌이 생겨난다. 새로운 느낌이 생성 되었다가 곧바로 소멸된다. 그럼에도 자이나교도들은 과거 전생에 악업 지은 것에 대해서 현생에서 몸을 학대하여 지독한 고행을 하면 과거 괴로운 느낌의 악업이 소멸된다고 믿었다.

그때 느낌과 지금 느낌은 다른 것이다. 과거전생의 느낌은 생성되자 마자 소멸되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악업을 소멸한다고 고행한다면 그 고행으로 인하여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지금 이와 같이 고통스럽고 아프고 찌르는 듯한 느낌만을 느끼는 니간타들은 전생에 악한 행위를 한 자들이다."(M101)이라고 했다. 또 부처님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지금 이와 같이 고통스럽고 아프고 찌르는 듯한 느낌만을 느끼는 니간타들은 전생에 악한 주재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들이다."(M101)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내가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평정하게 관찰할 때에 평정의 계발을 통해, 내게서 이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M101)라고 했다. 이 가르침에 대한 비유가 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는 다른 남자와 수다를 떨며 농담하고 웃고 있다. 자신의 아내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남자는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도 눈이 뒤집혀질 것이다. 경에서는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날 것입니다."(M101)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로 인하여 괴로움에 빠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내가 그녀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리면 어떨까?"(M101)라고 했다.

여자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버리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내가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노력을 기울일 때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나에게서 이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내가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평정하게 관찰할 때에 평정의 계발을 통해서, 내게서 이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M101)

 


부처님 가르침은 탁월하다. 자이나교도들은 괴로움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전생의 악업에 대한 것이라 하여 몸을 지독하게 학대하여 업장소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현상을 관찰하라고 했다. 괴로움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관찰할 때 괴로운 느낌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농담을 하며 희희낙낙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을 때 분노, 슬픔, 비탄, 괴로움이 생겨날 것이다. 만일 그 남자가 아내와 이혼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형성들에 대하여 마치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되고나의 것을 붙잡지 않는다.”(Vism. 21.61)라고 했다.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했을 때 아내가 다른 남자와 희희낙낙하는 꼴을 못 볼 것이다. 그러나 이혼했다면 전처가 되기 때문에 희희낙낙해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자를 전처보듯 했을 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위대하다. 이런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는데 그 동안 모르고 있었다. 니까야를 접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읽어 보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필요한 부분만 본다면 놓칠 수 있다.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를 두고 읽기를 잘 했다.

니까야를 보면 오백년, 천년이 지나도 감탄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 과거에도 있었을 것이다. 니까야를 읽으면 읽을수록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진다. 이번에 읽은 101번 경에서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도 그렇다.

괴로운 느낌이 발생 했을 때 전생 업보로 돌려서는 안된다. 느낌은 접촉으로 발생된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관찰하면 된다. 관찰하면 사라진다. 그럼에도 느낌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희희낙낙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괴로움을 고행으로 없앨 수 없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없애고자 한다면, 마치 걱정을 해서 걱정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관찰에 의해서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마치 이혼한 전처를 보는 것처럼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022-06-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