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불식하면 어떤 이익이
속이 편치 않다. 잠도 자는둥마는동하다. 왜 그럴까? 어제 저녁 육고기 먹은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속이 편하지 않을 때 먹는 약이 있다. 믿고 먹는 약이다. 그것은 서산 보광당 한약방에서 제조한 십년환이다. 속이 불편할 때나 과음 했을 때 먹으면 효과 있는 환약이다. 평상시에도 새벽에 복용한다. 위장에 좋은 약이다.
새벽에는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 몸과 마음이 편해야 한다. 한잠 자고 나면 마치 흙탕물이 정화된 것처럼 개운해야 한다. 그럼에도 몸이 개운치 않은 것은 전날 먹은 음식의 영향이 크다. 이럴 때 가만 있을 수 없다.
일어 나서 경행을 했다. 누워 있는 것보다 낫다. 누워 있으면 그 상태이지만 일어 나서 걸으면 달라진다. 경행이 행선이 되도록 했다. 전의 상태보다 나아 졌다.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무언가 부족했다. 이럴 때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암송하는 것이다.
빠다나경 25게송을 암송했다. 암송할 때는 결심을 해야 한다. 끝까지 완주하기로 결심하고 스타트하는 것이다. 먼저 제목부터 "빠다나숫따"라고 선언한 뒤에 "땀 맘 빠다나빠히땃따 나딩 네란자랑빠띠"하며 1번 게송부터 암송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따테반다라야다야따티"라며 25번 게송을 암송 했을 때 "사두 사두 사두"하며 끝낸다.
매일 암송하고 있다. 애써 어렵게 외운 것을 잊어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암송한다. 마음을 다 잡고자 할때도 암송한다. 암송하다 보면 막힐 때도 있다.
암송하다 보면 지시대명사가 "땃따"인지 "땃사"인지 햇갈릴 때가 있다. 기억나지 않는 단어도 있다. 하루만 암송하지 않아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럴 때는 다 암송하고 난 다음에 원문을 보아야 한다.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원문을 보고 확인한다.
빠다나경을 암송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전혀 다른 상태가 되었다. 이전에 찌뿌둥함이 사라졌다. 아마도 집중의 효과일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했을 때 이전 것은 잊어 버린다. 암송하기 위해서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을 때 몸과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육고기를 먹지 않아야겠다. 먹을 때는 알 수 없으나 먹고 나면 후유증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반주로 술도 마셨다. 담금주 세 잔 마셨다. 음식개념으로 마신 것이다. 이런 것도 몸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음식절제가 안된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나온다. 음식의 적당량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몸을 생각해서 일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잘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잘 먹는 것은 고기를 먹는 것을 말한다. 고기를 먹어야 몸이 튼튼해지고 건강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기만 찾았다. 반찬투정한 것이다.
한번 형성된 습관은 바꾸기 힘들다. 이 나이 되도록 고기를 찾는다. 육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육고기를 먹으면 반드시 탈 나는 것 같다. 그것은 육고기만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기 있는 곳에 술이 따른다.
몸은 민감한 것 같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균형이 무너지는 것 같다. 조리할 때 양념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이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몸의 상태도 달라진다. 어떤 음식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공복에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면 즉각 반응이 온다.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몸은 악기처럼 민감하다. 어떤 의도를 가졌느냐에 따라 몸상태가 변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한다.”(A6.63)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육고기를 먹은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양보충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육고기를 산 것이다. 그런데 육고기는 술을 부른다는 것이다.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과 같다. 이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육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육고기를 먹지 않고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저녁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강박인지 모른다. 실제로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오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아침과 점심 두 끼만 먹어도 충분하다.
부처님은 오후에 먹지 말라고 했다. 이른바 오후불식을 말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저녁밥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간식도 먹지 않아야 한다. 마시는 것은 허용된다. 배가 고플 때 미숫가루를 물에 타 마시면 되는 것이다. 주스도 되고 꿀물도 된다. 부처님은 오후불식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밤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 밤에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을 즐긴다."(M70)
부처님이 처음부터 오후불식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세 끼를 다 먹었다. 세 끼에서 두 끼로 줄이고, 두 끼에서 한 끼로 줄였다. 마침내 오후에는 먹지 않게 되었다. 오후에 먹지 않으니 건강에 좋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을 즐기기 바란다."(M70)라고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오후불식을 권장 했다. 이후 율장에서는 오후에 먹지 않는 계율이 생겨났다. 승가의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능하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오후에 먹지 않는다.
오후불식을 체험한 바 있다. 2019년 1월 미얀마 위빠사나 선원에 있었을 때이다. 매일 새벽 법회 때에 구계를 받아 지녔는데 오후불식 조항이 있었다. 실제로 낮 12시 이후부터 다음날 해 뜰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견딜만 했다. 오후불식하면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M70)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틀림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후불식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실천이 되지 않는다. 오후소식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적게 먹는 것도 실천되지 않는다. 고기라도 먹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역시 실천되지 않는다.
고기 있는 곳에 술이 있다. 술을 마시면 취기 때문에 집중을 방해한다. 낮술을 마시면 공부도 안되고 일도 안되고 명상도 안되는 것은 알콜이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술은 많이 마시든 적게 마시든 만악의 근원이 된다.
고기 있는 곳에 술이 있다. 고기가 없으면 술도 없을 것이다. 술을 끊으려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고기를 먹으면 술도 먹게 되어 있다. 술을 마시면 집중에도 방해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지 않다. 과도하게 조미료를 쳐서 음식을 망치는 것과 같다. 이는 잘 먹겠다는 의도가 개입된 것이다.
"마치 날개를 가진 새가 어디로 날든지 날개를 유일한 짐으로 하늘을 날 듯, 이와 같이 수행승은 옷은 몸을 보호하는 것으로 족하게 걸치고, 식사는 배를 유지하는 것으로 족하게 하고, 어디에 가든지 이것들만 가지고 갑니다."(M27)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수행자에게 식사는 "배를 유지하는 것으로 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많이 먹겠다는 것과 잘 먹겠다는 것은 탐심이 개입된 것이다.
오후불식은 수행자로 하여금 욕심을 없게 만들어 준다. 실제로 수행처에서 저녁밥을 먹지 않다 보면 몸과 마음이 편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내려 놓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밤에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M70)이라는 말은 음식에 대한 갈애를 내려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케케묵고 낡은 이야기라고 폄하한다.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 해보지 않은 사람이 비난한다는 말이 있다.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니까야를 비판하기도 한다. 후대 편집된 것으로 오리지날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읽어보지도 않고 의심부터 하는 것이다. 니까야를 읽어 보았다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니까야를 읽으면 읽을수록 틀림없는 부처님 말씀이라는 확신이 든다. 오후불식에 대한 가르침도 그렇다. 부처님은 오후불식하는 것에 대한 이익되는 것으로써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삶"(M70)이라고 했다. 이것만 있을까? 경에서 이런 가르침도 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또 다른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에게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줄어드는 반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늘어난다.'라고 알고, 보고, 깨닫고, 지혜로써 접촉하여, 그와 같이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성취하라.'고 나는 말한다."(M70)
외도들은 식사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하루 세 끼 먹는 즐거움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하루 한 끼만 먹어도 즐거운 삶이 된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는 "이와 같은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성취하라."(M70)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일까?
흔히 밥을 먹을 때 욕망으로 먹고 분노로 먹는다고 말한다. 먹고 마심으로써 욕망을 해소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이것이 범부들의 삶의 방식이다. 음식을 탐, 진, 치로 먹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식사는 배를 유지하는 것으로 족하게 하고"(M27)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탐, 진, 치로 먹지 않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욕망의 식사를 하고 분노의 식사를 한다. 회사원이 퇴근하여 술자리를 가질 때 상사를 안주로 삼는 것은 분노의 식사가 될 것이다. 고기가 몸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기반찬을 먹는다면 욕망의 식사가 된다. 수행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 어리석은 식사가 된다.
부처님은 오후불식과 관련하여 "그에게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줄어드는 반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늘어난다."(M70)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각주에서 "즐거운 느낌은 욕망을 여읨으로 얻는 즐거운 느낌으로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그리고 ‘SN.IV.232’를 보라고 했다. 찾아 보니 느낌에 대한 가르침이다.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수행승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무엇이 느낌이고, 무엇이 느낌의 발생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이고, 무엇이 느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고, 느낌에 있어서 유혹은 무엇이고 위험은 무엇이고 여읨은 무엇입니까?”(S36.23)라고 물었다. 이런 질문에 제대로 된 질문이다. 수행승은 사성제의 논법으로 질문했다. 이런 질문에 역시 사성제 논법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수행승이여, 이러한 것을 느낌이라고 하는데, 접촉이 생겨나면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의 발생으로 이끄는 길은 갈애이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한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만이 느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무릇 느낌을 조건으로 즐거움과 만족이 생겨나는데, 그것이 느낌의 유혹이다. 느낌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그것이 느낌의 위험이다. 느낌에 대하여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끊으면, 그것이 느낌의 여읨이다.”(S36.23)
부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말이다. 니까야에서 이런 문장을 접하면 부처님의 원음을 듣는 것 같다. 부처님은 사성제의 논리로 느낌에 대하여 설명했고, 또한 연기법적 논리로 설명했다. 그런 느낌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느낌에 매달리거나 목숨 걸 필요가 없다.
부처님은 오후에 먹지 말라고 했다. 실제로 해보니 좋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권유한 것이다. 그런데 오후에 먹지 않는 것은 욕망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먹는 것은 생존과도 관련 있다. 그런데 오후에 먹지 않으면 욕망을 줄이는 삶을 살게 된다.
욕망이 일어나면 채워야 하는 것일까? 배고프면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탐욕으로 먹으면 문제가 된다. 욕망으로 욕망을 채우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욕망은 욕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더욱더 갈증만 날 뿐이다. 욕망은 욕망의 여읨으로 욕망을 제거할 수 있다. 욕망은 느낌과도 관련 있다.
즐거운 느낌은 조건 발생하는 것이다. 접촉에 따라 조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이와 같은 느낌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상하게 변화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느낌에 대하여 유혹이라고 했고 위험이라고 했다. 저녁에 밥을 먹는 것도 욕망에 따른 즐거운 느낌 때문이다. 저녁에 먹지 않는다면 욕망에 따른 즐거운 느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욕망과 탐욕을 끊는 것에 대하여 느낌의 여읨이라고 했다.
식사에는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하루 세 끼 먹는데 한 끼만 줄여도 욕망은 줄어 든다. 저녁에 밥을 먹지 않는다면 욕망으로 먹는 것도 줄어 들게 된다. 욕망을 여읨으로써 즐거움이 생겨난다.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지는 것이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 저녁밥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소식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적게 먹을수록 욕망은 줄어 둔다. 반드시 고기를 먹을 필요는 없다. 고기반찬을 찾는 것은 욕망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고기 있는 곳에 술이 있기 마련이다. 술은 즐거워서도 마시지만 때로 분노로 마시기도 한다. 고기와 술은 먹지 말아야 한다. 먹고 나서 후회한다.
범부들의 식탁은 욕망의 밥상, 분노의 밥상이 되기 쉽다. 부처님은 오후에 먹지 말라고 했다. 욕망을 줄이라는 말과 같다. 저녁에 밥을 먹지 않으면 배는 고프지만 그 대신 몸과 마음이 편하다.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 같다. 이럴 진데 고기반찬이 있어야 할까? 앞으로 육고기를 먹지 말아야겠다.
2022-07-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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