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굼실굼실 무섭게 흐르는 안양천을 보면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30. 15:56

굼실굼실 무섭게 흐르는 안양천을 보면서


비가 엄청나게 왔구나. 오늘 낮 집에 가는 길에 안양천을 건넜다. 집에 가서 밥먹기 위해서였다. 점심값도 아끼고 걷기운동도 된다.

어디까지 안양천일까? 구로에서도 안양천이라 하고 목동에서도 안양천이라고 한다. 안양에서 시작해서 안양천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군포와 의왕에서 넘어오기 때문이다.

 


안양에 안양천이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정확하게 학의천과 만나는 쌍개울 안양천이다. 비산사거리 가까이에 있다. 평소 건너 다니던 징검다리는 물속에 잠겼다. 무지개다리에는 오물이 잔뜩 끼여 있다.

무지개다리가 범람하면 큰 비가 온 것이다. 어제부터 밤새도록 오늘까지 내렸으니 연 이틀 퍼 부은 것이다.

 


물살이 거세다. 흙탕물이 파도치며 쏜살같이 내려 간다. 휩쓸려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럴 때 어떤 표현을 해야 할까? 아마도 "굼실굼실" 흘러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굼실굼실 흘러가는 물을 볼 때 폭류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나운 물결이다. 모든 것을 쓸어 가버릴 것 같은 맹렬한 기세의 급물살이다. 우리는 폭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존재 아닐까?

 


네 가지 폭류가 있다. 감각적 욕망의 폭류, 존재의 폭류, 사견의 폭류, 무명의 폭류를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네 가지 폭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기 때문에 저언덕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
예전에 나는 흉적으로서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었었네."(M86)

앙굴리말라는 연쇄살인자였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만나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이전에는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다고 했다. 어떤 폭류일까? 네 가지 폭류에 모두 해당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견의 폭류와 무명의 폭류에 휩쓸렸을 것이다.

저언덕으로 건너가기가 쉽지 않다. 굼실굼실대며 흐르는 폭류를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머물고 만다. 설령 건너 가려고 시도 해도 휩쓸려 버리고 만다. 저언덕으로 건너갈 수 없는 것일까?

"
언제나 계행을 갖추고, 지혜가 있고,
삼매에 들고, 성찰할 줄 알고,
새김을 확립한 님만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흐름을 건넙니다.”(Stn.174)

도저히 저언덕으로 건너갈 자신이 없다. 그러나 계행, 지혜, 삼매, 성찰, 새김을 갖추면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정신적 건너감이다. 이를 초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센 물살을 건너 갈 수 없다. 저언덕이 좋아서 건너가려고 하지만 물살에 떠내려 가고 말것이다. 어떻게 해야 건너갈 수 있을까?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S1.1)건너는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은 애쓰지도 말고 가만 있지도 말라고 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과도하게 노력하면 휩쓸려 버리고, 반대로 가만 있으면 가라앉는다는 말이다. 중도로서 건너야 함을 말한다.

저언덕으로 건너는 데는 계행, 지혜, 삼매, 성찰, 새김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팔정도에 있는 술어이다. 팔정도로 저언덕을 건너야 한다. 팔정도라는 뗏목으로 건너가야 함을 말한다.

팔정도를 중도라고 한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57.11)라고 하여 중도는 팔정도라고 했다. 팔정도가 중도인 것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3번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
벗들이여,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니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입니다."(M3)

팔정도가 중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도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중간길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최근 불교TV(BTN)에서 이진경 선생 강연을 들었다. 중도에 대하여 초월로 설명한 것이 신선했다. 중도는 초월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 공감했다.

중도가 왜 초월인가? 왼쪽길도 아니고 오른쪽길도 아니고 중간길도 아니면 어느 길일까? 왼쪽과 오른쪽을 초월한 길을 중도라고 말할 수 있다.

중도가 초월의 길이라면 팔정도도 초월의 길이 된다. 팔정도는 저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가르침의 뗏목이다. 저언덕으로 가려면 초월해야 한다.

가만 있으면 가라 앉아 버리고 애쓰면 휩쓸려 버린다.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S1.1) 건너가야 한다. 초월하는 수밖에 없다. 계행, 지혜, 삼매, 성찰, 새김을 갖추어 초월하는 것이다.

중도는 초월의 길이다. 저언덕으로 가고자 한다면 이언덕을 초월해야 한다. 바라밀을 뜻하는 빠라미(parami)는 완성이라기 보다는 과정이다. 이언덕에서 초월하여 저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팔정도의 뗏목을 타고 초월하는 것이다.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초월하는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안식처를 얻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폭류에 휩쓸렸다고 했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가르침의 뗏목으로 초월한 것이다. 저언덕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었다.

 

누구나 가르침의 뗏목으로 저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월해야 한다. 중도로서 초월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초월이다."라는 말은 타당하다. 굼실굼실 무섭게 흐르는 안양천을 보면서 빠라미, 초월, 중도, 팔정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2022-06-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