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로부터 슬픔이
친구의 범주는 어디까지 일까? 요즘에는 에스엔에스에서도 친구라고 말한다. 페이스북 친구, 페친이 대표적이다. 친구는 어떤 관계이어야 할까? 당연히 우정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우정은 나이를 초월한다. 성별도 초월한다. 우정의 관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반드시 동갑이어야만 친구라고 여기는 것은 낡은 사고 방식이다.
우정에는 나이도 초월하고 성별도 초월한다. 당연히 지위도 초월한다. 공감하고 연민할 줄 알고 필요할 때 도움을 준다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
열 살 아래 친구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 어느 모임에서 만났다. 종종 전화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에스엔에스도 볼 수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친구라고 볼 수 있다.
친구에게 커다란 불행이 생겼다. 자식이 죽은 것이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요지경이다. 어떤 이는 "페이스북은 세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배울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배울 것도 배울 것 나름일 것이다. 나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교사나 역행보살이라는 말도 있다. 타인의 행태를 보고서 나를 돌아 보았을 때 역시 배울 것이 있다.
어느 페친은 단란한 가족사진을 올렸다. 자식이 성장한 얘기도 곁들였다. 청소년기 사랑스런 아들이 잘 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글과 사진이 때로 불행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쓸 때 가족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아내가 신신당부한 것도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 자랑할 것도 없다. 숨기고 싶은 것이 더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족 이야기를 한다.
가족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족 중의 한사람은 타겟이 되기 쉽다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글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이다. 가족 울궈 먹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가족 중에는 원수 같은 사람도 있고 사랑스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식은 누가 뭐래도 사랑스럽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로부터 슬픔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요즘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가 있어서 기회만 되면 열어 본다. 맛지마니까야 87번 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장자여, 그것은 이와 같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다."(M87)
부처님은 아들을 잃은 장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슬픔이 생겨난다고 했다. 장자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슬픔이 생겨난다는 부처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은 기쁨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 역시 기쁨 그 자체이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기쁨이 슬픔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 때나 사랑하는 연인이 떠났을 때 슬픔으로 가득해진다.
아들을 잃은 장자는 부처님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길에 도박판을 보았다. 어느 도박꾼에게 자신의 처지를 말했다. 도박꾼은 "환희와 쾌락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납니다."(M87)라고 말했다. 장자가 생각했던 것을 인정해 준 것이다.
장자는 한쪽면만 봤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기쁨이 생겨난다는 것만을 본 것이다. 그러나 현자는 양쪽면을 다 본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기쁨이 생겨나지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슬픔도 생겨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양면성이 있다. 현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도 슬픔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부모나 형제가 죽었을 때 절감한다. 하물며 자식은 어떠할까? 그래서 부처님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난다."(M87)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미움도 괴로움이고 사랑도 괴로움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갖지 말라."(Dhp.210)라고 했다. 미움도 사랑도 슬픔의 씨가 되기 때문이다.
현명한 자는 애착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로부터 슬픔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만나지 못함이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않은 자는 만남이 괴로움이다."(Dhp.210)라고 했다.
지나치게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가족 사랑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에스엔에스에서까지 가족사랑을 과시한다면 시기와 질투를 유발할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더욱 더 커질 것이다.
오늘날 에스엔에스에서는 자신을 과시하는 장이 되었다. 이미지 세탁하는 장이 되기도 하고 홍보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이럴 때 성찰의 글을 만나면 반갑다. 불리한 것도 털어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다짐하는 글을 보면 진정성이 느껴진다.
오늘날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는 자기자랑과 먹방의 장이 되었다. 때로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한 것을 올려 놓기도 한다. 골프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골프채를 잡아 본 적이 없다. 부르조아 운동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골프이야기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눌러 준다. "좋아요"라고. 자비심에 눌러 준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상 에스엔에스에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이미지개선하고, 홍보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자랑질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에스엔에스에서 담마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에스엔에스에서 글 쓰는 행위는 자랑질 하는 것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자 무미건조한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외면 받는다. 요즘 같은 감각을 추구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패스 당하는 것 같다.
저 스님이 한번 관심을 보여 줄 만한데 공감이 없다면 서운하다. 저 교수가 한번 눌러 줄법한데 반응이 없다면 아쉬운 감정을 어찌할 수 없다. 저 시인이 글을 줄만 한데 가만 있으면 야속하다. 이 모두가 인정욕구 때문일 것이다.
군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고 성을 내지 않는다고 했다. 이른바 군자삼락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은 "만족할 줄 알면서 만족할 줄 안다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A8.30)라고 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면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슬퍼하지 않는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타인의 안전을 책임져 줄 수 있다. 나는 자비롭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며 살아가고자 한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면 눌러 줄 수 있다. "좋아요"라고. "힘내세요"라고.
나에게는 친구가 많다. 인터넷 가상공간에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성별을 따지지 않고 나이를 묻지도 않는다. 당연히 학벌이나 지위도 따지지 않는다. 공감할 줄 알고 연민할 줄 알면 친구이다. 무엇보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친구가 있다. 커다란 슬픔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다만 "힘내세요"라고 눌러 줄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슬픔이 생겨난다."라고.
이 세상 그 어느 집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쁨도 생겨나지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슬픔도 생겨난다. 언제까지나 이 행복이 계속될 수 없다.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운명적 파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슬픔이 생겨난다.
2022-07-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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