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온의 배후에는 초자아가 있다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7. 16. 09:32
오온의 배후에는 초자아가 있다는데

지금 시각 2시 34분, 세상은 고요하다. 바로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아파트에서 이 시각만큼은 조용하다. 앞으로 아침 6시까지는 내시간이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글쓰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긴 글을 쓴다. 글은 논리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경전을 인용하면 늘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글에 대해서 충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수행한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하기를 언어로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언어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이 말들은 선종의 종지에 대한 것이다. 한결같이 언어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견성성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부만 맞을 수 있다. 언어 없이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 모아 놓으면 책장으로 가득하다. 목판본을 모아 놓으면 장경각에 가득하다. 책으로 만들어 놓으면 한수레 이상 될 것이다. 이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읽어야 할까? 더구나 한자로 되어 있다면 암호문 같아서 장식품이나 다름없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니왔음직 하다.

오늘날 빠알리 삼장은 번역중에 있다. 율장은 완역되었고 경장은 거의 번역되었다. 논장은 더 번역되어야 한다. 빠알리 삼장을 접하면 마치 잃어버린 비밀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 같다. 오래 전에 완성된 형태로 가르침이 전승되어 왔으나 어느 때 단절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고학적 발굴을 하는 것처럼 삼장을 발견했을 때 잃어버린 전설속의 고대도시를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다.

가르침은 잘 설해졌다. 가르침은 경, 응송, 게송 등의 구분교의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세상에 알려진 것은 150여년전 밖에 되지 않는다. 스리랑카에서 잘 보전 되어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니까야 번역서를 갖게 되었다.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경전이다.

불교에 입문한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2004년 능인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함으로써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곳에서 접한 것은 대승불교였다. 교리도 배웠지만 기도위주 불교였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양이 차지 않았다.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했다.

한국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그분이 무슨 말씀을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가르침을 잘 모르다 보니 기도 위주의 신행이 되었다. 마치 유일신교의 신에게 비는 것 같은 불교가 된 것이다.

불교가 능인불교교양대학이 처음은 아니었다. 중학교때 불교를 접했기 때문이다. 동대부중에서 처음 불교를 접했다. 일주일에 한번 불교시간이 있어서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때 불교선생님은 조용길 선생님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용길 선생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 조용길 선생님은 서른살 전후였던 것 같다. 아마 총각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을 가르쳤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흰 쥐와 검은 쥐가 줄을 갉아 먹는다는 이야기는 실감 났다.

흰 쥐 검은 쥐 이야기는 니중에 안 사실이지만 안수정등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칠판에 그림으로 그려 가면서 설명 했는데 얼마나 실감있었는지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상태가 되었다.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다. 참으로 답답하고 갑갑했다. 이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중학교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불교시간 교재에서 '세상이 불탄다'는 내용이 있었다. 부처님이 산정에서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세상이 불탄다고 했다. 부처님은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 그때 당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화두처럼 남았다.

세상이 불타는 이야기는 나중에 알았다. 니까야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을 말한다. 경에서는 시각도 불타고 형상도 불타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라고 했다. 여섯 감역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여섯 감역이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탐, 진, 치의 불로 불타고 있다고 했다. 탐, 진, 치라는 윤회의 땔감으로 불타고 있는 것이다.

지난시절을 되돌아 보니 불교에 대한 싹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불교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도 인연일 것이다.

불교에 대해서 한동안 잊고 살았다. 세상사가 잘 풀리지 않자 불교를 찾게 되었다. 불교를 접하면 내가 고민 했던 것에 대한 해법이 틀림없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2004년 40대 중반이 되었을 때 불교교양대학 문을 두드렸다.

부처님은 6년 고행 했다. 나중에 고행이 무의미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 깨달아 보고자 한 것이다. 그때 생각한 것이 농경제 때 선정 체험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 12살 가량 되었을 것이다. 장미사과나무 그늘에 앉았을 때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는데,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일까?"(M36)라며 생각한 것이다.

부처님은 6년 고행후 35살 때 농경제 때 기억을 떠 올렸다. 장미사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첫번째 선정의 기억을 떠 올리며 깨달음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결국 네 번째 선정에서 숙명통과 천안통, 그리고 누진통의 지혜를 얻어 깨달음을 이루었다. 어렸을 적 좋았던 기억이 깨달음의 인연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불교와의 인연도 중학교 때 불교학교에서 부처님의 일생을 배운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부처님이 12살 때 농경제 때 장미사과나무 그늘 아래에서 초선정을 체험했던 것처럼.

초기불교를 알게 된 것은 2008년이다. 초기불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2009년 한국명상원 다닐 때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를 교재로 공부한 것이다. 묘원선생이 교재에 대해서 법문하고 위빠사나 수행지도를 했다. 매주 토요일 4시간 가량 50회 공부하고 나니 초기불교의 진수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불교공부는 글쓰기와 병행했다. 경전을 보고 느낀 것을 글로서 표현해 본 것이다. 매일 썼다. 이렇게 10년 이상 쓰다 보니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그러나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아니다. 필요한 부분만 보았다.

경전을 다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읽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했다. 그 많은 경전을 다 읽으려면 평생 읽어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필요한 때 필요한 경만 읽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요즘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세 달 되었다. 머리 맡에 놓고 있다 보니 수시로 열어 본다. 경전읽기를 생활화 하기 위해서이다. 맛지마니까야 152경 중에서 현재 115경까지 읽었다. 진도는 많이 나가지 않는다. 하루에 한두경으로 족하다. 새기며 읽기 때문이다. 중요 부위는 형광메모리펜으로 칠해 둔다. 나중에 그 부분만 읽으면 될 것이다.

경전을 다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몇 개의 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석까지 샅샅이 읽었다. 교정본을 읽었을 때이다.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 공부모임에 참여 하다 보니 편집위원으로서 교정도 보게 되었다.

이제까지 교정 본 것은 여러권 된다. 순서대로 나열하면 테라가타, 테리가타, 앙굿따라니까야 합본, 청정도론, 율장부기, 그리고 현재 출간을 앞두고 있는 자타카이다. 교정본을 읽었을 때 노트를 만들어 두었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았다. 나중에 글 쓸 때 사용하고 싶어서 메모를 남긴 것이다.

교정작업은 속도전이다. 빠른 속도로 훝어야 하기 때문에 진도가 빨리 나갈 수밖에 없다. 주로 오자와 탈자를 잡아내는 것이다. 너무 빠른 속도로 보기 때문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경전은 천천히 새기면서 봐야 한다. 현재 머리맡의 맛지마니까야를 그렇게 보고 있다.

앞으로 봐야 할 경전이 많다. 맛지마니까야를 보고 나면 디가니까야를 보려 한다. 그 다음에는 상윳따니까야를 보려고 한다.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감명 깊은 구절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글쓰기 소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경전을 건성건성 봤다. 필요한 부분만 본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경전은 마치 소설 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 보아야 한다. 각주에서 지시하는 대로 참고 경도 찾아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새기면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래동안 기억하고 싶은 것은 칠해둔다. 다음에 볼 때 도움이 된다.

맛지마니까야를 처음부터 촘촘히 보고 있다. 필요한 부분만 건성건성 봤을 때와 차이가 있다. 이른바 디테일을 본 것이다. 진리는 디테일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를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다.

"물질은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느낌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지각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형성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의식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M109)

어떤 수행승에게 일어난 생각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오온에 대해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행승은 초자아를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M109)라며 의문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아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수행승은 자신의 행위의 주체가 되는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참나 같은 것이다.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아는 놈이 있음을 말한다. 오온이 무아인 것은 인정하지만 오온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는 초자아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진아를 말한다. 진짜 나가 있다는 것이다. 진짜 나가 있다면 가짜 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상과 본체로 설명한다. 여기서 본체는 진아, 참나, 대아, 초자아 같은 것이다.

니까야를 읽으면 선종에서 주장하는 것 대부분은 깨진다. 수행승이 초자아를 상정했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했을까? 부처님은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앞지를 수 있다."(M109)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수없이 오온무상에 대한 가르침을 설했음에도 여전히 초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것에 대한 훈계인 것이다.

부처님은 초자아를 말하는 수행승에게 문답식으로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무아상경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라며 묻는다. 이와 같은 문답식 가르침으로 오온에 대하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이것은 내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옳은 것인가?"(M109)라며 묻는 것이다.

2004년 불교교양대학 다닐 때의 일이다. 원장 스님은 교육할 때 비디오론을 말했다. 스님은 "여러분 일거수일투족을 다 찍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비디오로 찍고 있다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업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에 따르면, 부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또한 부처님은 다 보고 있다고 했다. 마치 감시당하는 느낌이었다. 부처님 대신에 하나님을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금강경을 보면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은 다 알고 다 보는 분이라는 것이다. 마치 전지전능한 부처님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까야를 보면 유사한 표현이 있다.

"벗이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모든 것을 아는 자이고 모든 것을 보는 자로 이와 같이 완전한 앎과 봄을 주장합니다. '나에게는 가거나 서있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언제나 항상 앎과 봄이 나타난다.'그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M101)

자이나교도가 자신의 스승 니간타 나따뿟따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앎과 봄이 현전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현전한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오로지 대상에 대해서만 앏과 봄이 현전한다고 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다. 삽반뉴라 하여 전지자라고 한다. 이는 부처님이 우빠까에게 "일체를 아는 자"(M26)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화엄경 마혜수라처럼 우주의 빗방울 숫자까지 아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은 일체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각영역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집착없이 해탈을 성취했다."(M102)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부처님은 우주의 빗방울 숫자까지 다 아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뿟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보는 자라고 했다.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앎과 봄이 현전한다고 했다. 부처님은 꿈속에서 앎과 봄을 말하지 않았다. 경전에는 꿈의 비유가 거의 없다. 그대신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을 말했다. 여실지견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실지실견이라고 했다. 이 말은 6분 정신희유분에서 "여래실지실견제중생득여시무량복덕(如來悉知悉見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라는 표현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이 공덕짓는 것을 다 알고 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 말에 근거하여 원장 스님은 비디오를 찍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보는 존재로서 부처님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뿟따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 알고 보는 존재이다. 그러나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물론 세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래서 세간해라고 한다.

부처님의 앎과 봄은 대상과 접촉했을 때이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도 '물질을 제외하고, 느낌을 제외하고, 지각을 제외하고, 형성을 제외하고, 의식을 제외하고, 오고 감, 죽음과 다시 태어남, 그 성장, 증대, 성숙을 나는 설한다.'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M102)라고 했다.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자아를 세운다. 오온이 무상한 것은 알지만 더 큰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후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간파한 것 같다. 경에서는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다."(M102)라고 설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다. 외도의 견해를 말한다.

자아에 대한 견해는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이런 견해는 부처님의 설법을 여러번 들었던 수행승에게도 나타났다. 이는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M109)라며 의문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불교 스님들도 초자아에 대한 주장을 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혜민 스님은 그놈을 말했다. 초자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초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선종 게송에도 있다는 것이다. 선가귀감에서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선가귀감)라는 말이 그것이다.

혜민 스님의 깨달음을 보면 초자아가 상정되어 한다.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진아, 참나, 본래면목, 불성, 본체 같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이블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바이블에 요한복음이 있다. 요한복음 1장에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目) 화두와 유사하다. “부모 몸에 들기 전에 어느 것이 참나인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본래면목은 홀로밝은 동그라미, 소소영영한 한 물건, 그 놈 등과 같은 의미이다. 요한복음에 있는 그분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오늘도 긴 글을 썼다. 현재시각 6시 11분이다. 무려 3시간 37분 동안 엄지로 친 것이다. 정리하면 30분 더 걸릴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긴 글을 쓰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경전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언어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가르침은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연 읽어 보기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해보지 않은 사람이 해보지 않은 것을 비난한다고 말한다. 경전에서 신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수행해 보지 않은 사람이 수행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은 자가 니까야를 비난한다. 자현 스님 같은 사람이다.

자현 스님은 선종의 입장에서 초기불교를 비난한다.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자현 스님은 니까야를 읽어 봤을까? 4부 니까야를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 보았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필요한 부분은 읽어 보았을지 모른다. 니까야를 읽어 보았다면 후대 편집되었다든가 부처님 원음이 아니라는 소리를 할 수 없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이 있다. 경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뗏목론도 그렇다. 불립문자, 교외별전도 그렇다. 이렇게 경전을 무시하다 보니 엉뚱한 길로 빠진다. 초자아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불교가 살려면 경전부터 읽어야 한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말한다.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 하셨는지를 안다면 헛소리 하지 않을 것이다.

2022-07-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