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
"저기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거울이에요. 저 사람은 거울에 비친 당신입니다." 이 말은 페이스북에서 본 것이다. 어느 페이스북 친구가 올렸다. 남의 글을 올린 것이다.
상대방은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상대방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나의 모습이 그 사람에게 투영되어 나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마음의 그림자이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항상 나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보았을 때 상대방은 문제투성이다. 그 사람은 게으르고 부도덕하다.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이 일어 났을 때 상대방은 나의 마음을 알아서 부지런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방을 바라 보는 나의 마음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여 혐오의 마음이 일어 난다면 나의 마음은 혐오라는 불선법에 지배 받은 것이다. 그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여성 평론가의 글을 보았다. 그녀는 친구를 정리하고자 했다. 불필요한 친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마 공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방법이 놀라 웠다. 여성과 관련된 싸움판에서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이 대상이라고 했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잘못 누르면 페절 될 수 있다. 슬픈 글임에도 '좋아요'를 눌렀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럴 때는 '슬퍼요'나 '힘내세요'를 눌러야 할 것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싸움판에서 '좋아요'를 눌러도 퇴출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혐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대개 단점만 보고서 판단하려 한다. 이혼한 사람들 대부분은 단점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단점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절대는 없다. 상대방의 단점이라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의 행위를 보고서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자신의 마음이 분노라는 불선법에 지배 받은 것이다. 그 사람에게 책임을 떠 넘길 수 없다. 그렇게 바라보는 자의 마음이 오염된 것이다. 그 사람의 단점도 있지만 그 사람의 장점도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단점만 본다면 이 세상은 홀로 사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도 있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다. 현명한 자라면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요즘 굥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움을 넘어 혐오한다. 그래서 담벼락에 커다란 글씨로 써 놓듯이 페이스북에 큰 글씨로 써 놓는다. 어떤 이는 뉴스 기사를 근거로 하여 평론하기도 한다. 굥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고 굥이 고쳐질 것 같지 않다.
모든 것을 내뜻대로 하고자 한다. 아내나 남편도 내뜻대로 되어야 하고 자식도 내뜻대로 되어야 한다. 굥도 내뜻대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뿐이다. 불편한 심기만 드러낼 뿐이다. 상대방의 행위를 보고서 분노의 마음이 일어 났을 때 상대방이라는 거울로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된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세상에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 있지만,
여기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S1.34)
여기 명품 가방이 있다. 누구나 명품 가방을 갖고자 한다. 명품 가방을 갖고자 하는 마음은 감각적 욕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명품 가방은 감각적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가방일 뿐이다. 명품 가방을 봄으로 인하여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다.
명품 가방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명품 가방이 나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욕망에 오염된 것이다. 명품 가방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생각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아비담마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아비담마는 마음의 거울이다. 상대방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볼 수 있듯이, 아비담마를 알면 나의 행위를 보고서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탐욕을 예로 들 수 있다.
"기쁨이 함께 하고, 사견과 결합된, 자극 받지 않은 마음 하나"
이 말은 무슨 뜻일까? 탐욕에 뿌리박은 여덟 가지 마음 중에서 첫 번째 마음에 대한 것이다. 이 말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감각적 쾌락에 빠져도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식의 그릇된 견해를 앞세워 기쁘고 만족해진 사람이 열렬한 마음으로 타인으로부터 자극 받지 않고 감각적 쾌락을 즐기거나 또는 저속한 향연을 즐기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 때 첫번째의 해로운 마음이 일어 날 수 있다."(탐욕에 뿌리박은 여덟가지 마음 중에서 첫 번째 마음)
설명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기쁨, 사견, 자극이라는 세 개의 단어가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기쁨은 감각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사견은 감각을 즐기는 것은 잘못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자극 받지 않는 것은 감각을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이 모두가 해로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탐욕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심지어 감각기관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은 사견이다. 삿된 견해를 말한다. 감각을 즐기는데서 오는 위험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는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4.21)라고 말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이를 알아차림없이 무심히 바라 보았다면 탐욕이 된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서 감탄했다면 역시 탐욕이 된다. 시각적으로 즐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이 함께 하고, 사견과 결합된, 자극 받지 않은 마음"은 탐욕이 되어 해로운 마음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타인의 행위를 보고서 자신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지만 자신의 행위를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상태도 볼 수 있다.
여성평론가에게서 혐오를 보았다. 싸움판에서 '좋아요'를 눌렀다고 하여 무더기 페절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이버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실공간이라면 홀로 사는 사람들로 넘쳐 날 것이다.
평론가들이 많다. 특히 정치평론가들이 많다. 그들은 굥을 혐오한다. 굥이 혐오할 짓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혐오에서 분노를 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분노가 불선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사견이다. 담마를 모르기 때문에 사견이 사견인줄 모르는 것이다.
한상 거하게 차렸다. 술도 있다.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이 불선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혀는 즐기라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사견이다. 감각을 즐기고, 감각을 즐기는 것에서 기쁨을 찾고, 감각을 즐기는 것이 가치 있다고 본다면 "기쁨이 함께 하고, 사견과 결합된, 자극 받지 않은 마음"이 된다. 탐욕의 마음이다.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볼 수도 있지만 담마를 통해 자신의 마음도 볼 수도 있다. 타인은 나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나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상대방은 잘못이 없다. 나의 마음이 불선법으로 오염 된 것이 잘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다."(S1.34)라고 했다.
나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 그 사람은 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래서 "저 사람은 거울에 비친 당신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022-07-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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