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승과 제자는 우정의 관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7. 26. 07:24

스승과 제자는 우정의 관계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른다. 잠에서 깼을 때 잠이 오지 않는다. 가만 있으면 생각이 일어났다가 흘러간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일어난다. 새벽을 생각속에서 보낼순 없다.

일어났다. 일어나서 경행을 했다. 가볍게 걷는 것 만으로도 생각에서 해방된다. 더 좋은 것은 암송하는 것이다.

빠다나경 25게송을 암송했다. 경행하면서 암송하는 것이다. 나즈막히 소리내며 암송했다.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집중이 되었다. 오로지 암송과 암송하는 자만 있게 되었다.

암송이 끝났다. 이전과 다른 상태가 되었다. 생각이 싹 사라진 것이다. 생각해서 해방되었다. 이번에는 행선을 했다.

경행과 행선은 다른 것이다. 경행은 단지 가볍게 걷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행선은 동작 하나하나, 행위 하나하나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심지어 의도까지 알아차려야 한다.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면 잡념이 생겨나지 않는다. 마음은 발의 움직임에 가 있기 때문이다. 발의 움직임을 따라 좁은 방을 왔다갔다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밖은 캄캄하다. 더워서 문을 열어 놓고 잔다. 대로변이라 차량 질주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고요한 산사라면 어떨까라고 생각해 본다. 저절로 수행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도심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번뇌에 지배당하는 삶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은 달아났다. 지금이 몇시인지 모른다. 새벽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럴 때 경전 읽기만한 것이 없다.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손만 뻗으면 열어볼 수 있다. 줄치면서 읽는다. 경전이기 때문에 낙서를 해서는 안된다. 볼펜과 같은 펜으로 줄치지 않는다. 형광메모리펜으로 칠하면서 읽는다.

 


두 종류의 메모리펜이 있다. 노랑색과 분홍색이다. 기억하고 싶은 곳은 칠해 둔다. 그 중에도 새기고 싶은 구절은 분홍으로 칠해둔다. 나중에 그 부위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메모리펜이 닳았다. 더이상 색이 나오지 않는다. 경전읽기에서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다이소에 가서 꼭 사오리라고 다짐한 바 있다.

다이소에서 형광메모리펜을 샀다. 노랑색과 분홍색이 세트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한세트에 천원이다. 싼 맛에 세 세트 샀다.

새 메모리펜으로 칠하면서 경전읽기를 했다. 눈에 쏙쏙 들어 오는 것 같다. 오늘 새벽에는 맛지마니까야 122번경 '공에 대한 큰 경'을 봤다.

경을 보고 나면 무언가 하나라도 건져야 한다. 하나라도 새기는 것이 있어야 한다. 분홍색칠한 것이 하나 눈에 들어 왔다.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안내자로 하고 세존을 의지처로 합니다."(M122)라는 말이다. 부처님을 안내자로 본다는 것이 새롭다.

안내자로서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일까? 이에 대하여 "제자는 경전, 게송, 해설 때문에 스승들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M122)라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일까? 단지 가르침을 배우고, 기억하고, 입으로 외우는 것 등으로 스승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염오, 이욕, 해탈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스승을 따라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대화를 강조했다. 대화가 없다면 스승도 없는 것과 같다. 마치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수행결과를 점검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설령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화가 없으면 스승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스승과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욕망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출리에 대한 이야기, 교제를 떠남에 대한 이야기,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앎과 봄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는 경전이 의지처가 된다. 그러나 스승이 있다면 찾아 가서 배워야 할 것이다. 경전에서 접할 수 없는 가르침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수행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스승과 관련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대화라는 사실이다.

대화 없는 스승은 상상할 수 없다. 수행처에서 스승과 대화가 없다면 수행의 진척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과도한 대화도 곤란할 것이다. 잡담을 즐겨서도 안될 것이다. 본분사에 어긋나는 부업을 해서도 안될 것이다.

스승에게 잘못 보여 쫓겨날 위기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해탈이 도움이 된다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대화를 통해서 설사 스승이 쫓아내더라도 제자가 스승을 따라야 할 것이다."(M122)라고 했다.

초기경전에는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새겨야 될 것도 많다. 방대한 경전에서 한번 놓치면 찾기 힘들다. 그래서 색칠을 해둔다. 그러다 보니 온통 울긋불긋 색이 칠해져 있다.

부처님은 우정을 강조했다. 부처님은 "그대들은 우정으로 나를 대하고 적으로 나를 대하지 말라."(M12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스승은 같은 길을 가는 도반임을 말한다. 스승은 먼저 길을 간 사람이고 제자는 나중에 길을 간 사람이다. 먼저 간 사람이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안내자이기도 하다.

부처님은 부처님을 벗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는 "세존을 벗으로 삼아(Mamañhi kaly
āamitta)”(S3.1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을 수행도반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은 "그대들은 우정으로 나를 대하고"(M122)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우정의 종교가 된다.

우정의 종교로서 불교에서는 스승도 도반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스승과 제자 사이에 우정의 관계가 성립될까?

스승이 제자를 대하는 방식이 있다. 이는 제자들을 애민히 여기고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M122)라며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고 했다.

제자는 어떤 방식으로 스승을 대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제자들은 잘 듣고, 잘 귀를 기울이고, 지혜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빗나가지 않아서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는다."(M122)라고 했다.

흔히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부자지간과 같은 것으로 설명된다. 특히 한국불교에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까야에서는 우정의 관계라는 것이다. 스승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제자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제자들이 적으로 대하지 않고 우정으로 스승을 대한다."(M122)라고 했다.

날이 밝았다. 지금 시각 6 24분이다. 캄캄한 밤에 일어나 암송을 하고 행선을 했다. 그리고 경을 읽고 경에 대한 글을 썼다. 특히 글을 쓰다 보니 2시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 모든 과정이 번뇌에서 해방된 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2022-07-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