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불가 전륜왕의 사군과 부처님의 사성제
오늘 일요일이다. 자영업자에게 주말은 없다. 일이 있든 없든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나가야 한다. 오늘도 아침 일찍 일터로 향했다.
학의천과 안양천이 만나는 안양천이 있다. 비산사거리에서 가깝다. 안양천 징검다리를 건널 때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글쓰기 소재가 떠 오른 것이다. 경전에 본 것이다.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읽은 한 구절이 떠 오른 것이다.
오늘 일정을 바꾸었다. 도착하자마자 난 분갈이를 하고 난 다음 밀린 일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좋은 생각이 떠 올랐을 때는 달라진다. 생각이 달아 날 수 있다. 걷는 내내 달아나지 않도록 붙들어 매 두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달겨 들었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자판을 두드린 것이다. 글을 먼저 쓰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언젠가 불교TV(BTN) 사이트에서 스리랑카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한창 글쓰기가 물이 오르던 때였다. 사성제에 대한 강연이었다. 영어로 강의했는데 자막서비스가 되었다. 그런데 들어 보다 보니 이제까지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블로그에 기록해 둔다. 스리랑카 교수의 강연도 기록해 두었다. 블로그내에 있는 검색창을 이용하여 검색해 보니 2010년에 쓴 글이 발견되었다.
사성제에 대해여 네 편의 강연을 기록해 두었다. 그중에 하나가 ‘오취온(五取蘊)이 고통의 근원인 이유,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고성제(https://blog.daum.net/bolee591/16154691)’ (2010-08-04)이다.
아상가 교수의 강연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제까지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스님들이나 한국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강의한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상가 교수의 강의를 녹취했다. 자막을 노트에 받아 적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네 편의 사성제에 대한 글이 완성되었다.
아상가 교수의 고성제에 대한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군에 대한 것이었다. 사군은 코끼리부대, 기병부대, 전차부대, 보병부대를 말한다. 사군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전륜왕을 상징할 때 사군을 거느렸다고 말한다.
아상가 교수는 부처님의 고성제에 대하여 사군의 비유로 설명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사성제를 설했을 때, 이를 전륜왕이 사군을 거느리고 성문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법의 바퀴를 굴렸는데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 경전을 초전법륜경이라 한다. 여기에서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것일까.
고대 인도에서 바퀴는 왕의 ‘무장장갑차’를 상징한다. 이 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 내는데, 왕은 언제나 전쟁을 하여 합병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어느 왕이 바퀴가 달린 장갑차를 몰아 이웃 나라로 진군 할 때, 이를 저지하거나 막지 않는다면 그 왕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것이 인도의 오랜 관습이었는데, 부처님도 전차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태자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장갑차가 아닌 법의 바퀴를 굴리기로 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라고 말하며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삶의 현실이 아니어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담마(법)의 바퀴를 누구도 막지 못하고,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과 직면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이래 지금까지 법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다. 바로 지금 사성제를 언급 하는 것도 부처님의 법의 바퀴가 마치 전차처럼 앞으로 굴러 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취온(五取蘊)이 고통의 근원인 이유,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고성제, 2010-08-04)
아상가 교수의 강연을 녹취하여 나름대로 정리하여 꾸며 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군에 대한 것이다. 사군은 전륜왕의 막강한 코끼리부대, 기병부대, 전차부대, 보병부대를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사군은 부처님이 설한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와 대비 된다는 것이다.
전륜왕은 막강한 사군을 동원하여 적의 성문을 열게 했다. 막강한 사군 앞에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사성제의 진리로 사람들에게 다가 섰다. 사성제의 진리 앞에서 그 누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사성제를 진리로 받아 들였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고와 팔고를 설했을 때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여 딱 맞아 떨어졌을 때 사성제를 진리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전륜왕이 막강한 사군을 거느리고 적의 성문에 포진하고 있는 것과 같다. 전륜왕의 막강한 사군 앞에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어제 맛지마니까야를 읽다가 아상가 교수가 말한 전륜왕의 사군이야기와 유사한 가르침을 발견했다. 맛지마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이여, 그래서 그 보물은 동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전륜왕은 사군(四軍)을 거느린다. 그래서 만약에 수레바퀴가 정지하는 지방이 있다면, 그곳에서 전륜왕은 사군과 함께 진지를 구축한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동방에 있는 적의 왕들이 있다면, 그들은 전륜왕에게 다가와 이와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어서 오시오. 대왕이여, 환영합니다. 대왕이여, 모두가 그대의 것입니다. 대왕이여, 교칙을 내려주십시오.’ 전륜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말라.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말라.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지 말라. 먹기에 적당한 것을 먹어라.’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동방에 있는 적의 왕들은 전륜왕에게 귀순한다.”(M129)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전륜왕은 막강한 사군을 거느리고 동방, 남방, 서방, 북방에 있는 대륙을 정복한다. 그러나 피를 묻히지 않는다.
초기경전에 묘사된 전륜왕의 이미지가 있다. 이는 “그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정복하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M92)라는 구절이다. 그럼에도 전륜왕은 사군을 보유하고 있다.
전륜왕은 대륙을 정복할 때 사군을 동원한다. 막강한 사군 앞에 적은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경에서는 “대왕이여, 어서 오시오. 대왕이여, 환영합니다. 대왕이여, 모두가 그대의 것입니다.”(M129)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적의 왕은 “대왕이여, 교칙을 내려주십시오.”(M129)라고 말한다.
적의 왕은 성문을 열어 주었다. 성은 전륜왕의 것이 된 것이다. 이를 어떻게 통치해야 할까? 이는 적의 왕이 교칙을 내려달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전륜왕은 다음과 같이 교칙을 내려 준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말라.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말라.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지 말라. 먹기에 적당한 것을 먹어라.”(M129)
전륜왕이 내려 준 교칙은 오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먹기에 적당한 것을 먹어라.”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 같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니 “yathābhuttañca bhuñjathā”라고 되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서는 “적당히 먹을 만큼만 먹어라.”라고 했다. 영어 번역을 찾아 보니“Maintain the current level of taxation”(Bhikkhu Sujato)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현재의 과세를 유지한다.”라는 뜻이다. 한글번역과 영어번역에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륜왕은 담마로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다. 전륜왕은 정의로운 왕으로서 사방을 정복하여 나라에 평화를 가져 온다고 했다. 그런데 전륜왕이 내린 교칙을 보면 오계 플러스 음식절제라는 것이다. 전륜왕은 자신의 통치권 안에서 육계를 지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전륜왕의 육계에 대한 것은 디가니까야 ‘전륜왕사자후의 경’(D26)에도 실려 있다. 이와 같은 육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상가 교수의 강연에는 없었다. 이번에 맛지마니까야 읽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불자들은 오계에다가 음식절제를 하나 더 추가하여 육계를 지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전륜왕은 칼을 사용하지 않고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는 왕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아소까 대왕이 대표적이다. 아소까는 깔링가 전투의 참상을 겪은 후에 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을 포기 했다. 그 대신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것이 담마비자야(Dhammavijaya), 담마에의한 세계의 정복이다.
아소까는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천명했다. 그래서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렇게 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 아상가 교수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이를 녹취하여 글로 남겼다. 언제 보아도 명강의이다. 한국에서 사성제를 전륜왕의 사군과 대비하여 강의나 법문한 것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맛지마니까야를 읽다 보니 아상가 교수는 철저하게 경전을 기반으로 한 강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아상가 교수의 강연에서 또 하나 감명받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담마(법)의 바퀴를 누구도 막지 못하고, 되돌려 보낼 수 없다.”라는 말이다. 이 말도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보면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S56.11)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다.
부처님의 담마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구르는 바퀴이다. 소나 말이 끄는 바퀴를 연상하면 된다. 옆으로도 갈 수 없고 후진불가이다. 오로지 앞으로만 가는 바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쎌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립니다.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수레바퀴를.”(M92)
진리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전지만 하는 바퀴이다. 후진불가의 바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수레바퀴(cakkaṃ appativattiyaṃ)”라고 한 것이다.
전륜왕의 사군의 수레바퀴는 후진이 없다.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하는 바퀴이다. 말이 끄는 전차부대의 바퀴가 후진 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담마도 후진불가이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로 가는 법의 바퀴, 진리의 바퀴인 것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이 그렇다는 것이다.
사성제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누구도 사성제를 부정할 수 없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입니다.”라고 설했을 때 누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없다. 자신과 타인에게서 일어나는 생, 노, 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를 보았을 때 진리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서 틀림 없음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진리로서 받아 들일 것이다. 이것이 확신에 찬 믿음, 삿다(saddha)이다.
오늘 아침에도 신나게 썼다. 홀로 있는 사무실에서 웃통을 벗고 자판을 미친듯이 두드렸다. 아침에 안양천 징검다리를 건널 때 생각났던 것을 도착하자마자 자판을 두드린 것이다. 이제 글을 다 마쳤으니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2022-08-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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