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 죽으라는데
자극 받아서 글을 쓴다. 에스엔에스에서 어떤 사람은 여행기를 올리고 있다. 백개국을 여행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여행을 즐긴다고 했다. 남은 여생을 여행하면서 즐기며 살 것이라고 한다. 돈은 물려 주지 않고 다 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매번 나가는 것 같다. 일년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여행자의 말에 즐긴다는 말에 자극 받았다.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입장에서 부럽다기 보다는 강한 시기와 질투심이 유발되었다. 일시적으로 불선법에 지배 받은 것이다. 한편으로 나의 처지가 딱하다고도 생각되었다. 이 나이에, 은퇴해서 집에서 쉴 나이에 현역으로 뛰고 있는 것이 어두운 마음이 되었다.
어제 초분을 다투어 가며 일했다. 마무리 작업하다 보니 저녁에도 일했고 대충 일 끝났을 때 자정이 지난 12시 30분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에 일어나 7시 이전에 일터에 도착했다. 두 시간 집중해서 마침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메일로 작업한 것을 보내자 이제 편히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일하는 사람에게, 직장인에게, 생업을 가진 사람에게 해외에서 여행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열심히 읽어 보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본다. 일주일도 아니고 보름도 아니고 한번 나가면 몇 달씩 밖에서 보내는 인생은 전생에 어떤 선업공덕을 지었길래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까?
해외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을 보면 마치 오늘만 살 것처럼 사는 것 같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최대의 즐기는 삶을 사는 것 같다. 이제까지 모아 놓은 재산은 모두 즐기는데 사용하고자 하는 것 같다.
여행자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면 어떻게 될까? 몸이 망가져서 더 이상 여행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추억만 먹고 살아 갈까? 더 이상 즐기는 삶을 살 수 없을 때 삶의 의미도 없을 것이다. 마치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가 감각적 쾌락을 즐기기 위한 신체기관이 망가졌을 때, 더 이상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와 처지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행자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그것은 “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이 있는데 ‘여행하다 죽어라’라는 말도 있겠지요.”라는 말이다. 여행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하다 죽을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스님은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하다 죽어라.”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수행하다 죽으면 최고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들은 말이다.
수행자가 수행하다 죽으면 영광일 것이다. 들숨날숨 호흡을 보면서 임종을 맞는다면 열반에 들 것이라고 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순간 더 이상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수행하다 죽으면 정말 열반에 드는 것일까? 주석서에서는 수행하다 죽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로 설명한다.
사마시시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이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네 가지 사마시시가 있다. 질병의 사마시시(rogasamasīsī), 느낌의 사마시시(vedanasamasīsī), 자세의 사마시시(Iriyapathasamasīsī), 수명의 사마시시(jivitasamasīsī)를 말한다.
질병의 사마시시는 어떤 질병에 걸렸다가 질병의 치유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느낌의 사마시시는 어떤 느낌을 느끼다가 느낌의 지멸과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세의 사마시시는 어떤 자세를 취하면 통찰하는 자가 자세의 종료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명의 사마시시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네 가지 사마시시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네 번째 ‘수명의 사마시시’이다. 이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이 성취된다고 해서 사마시시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수행하다 죽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설령 수행하다 죽으면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선정 수행하다 죽으면 해당 선정에 해당되는 색계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하다 죽으면 모든 번뇌의 소멸되어 아라한이 되고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한다.
수행하다 죽으면 일석이조와 같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어로는 겟투(Get two)이다. 겟투는 담배이름이기도 하다.
죽음의 사마시시에는 어떤 예가 있을까? 대표적으로 고디까, 박깔리, 찬나 수행승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고디까 수행승이 있다.
고디까 수행승은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다.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 했다. 일곱 번째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결 했다. 칼로 자신의 동맥을 끊은 것이다. 고디까는 어디로 갔을까?
부처님은 제자들로부터 고디까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씨길리 산의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까지 올라 갔다. 그곳에는 자결한 고디까가 누워 있었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로 갔을까?
악마 빠삐만은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었다. 죽으면 어디선가 재생 되는데 재생연결식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마 빠삐만은 고디까의 의식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A4.23)라고 말했다.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퇴전과 불퇴전을 무려 여섯 번 반복하다가 일곱 번째 일시적인 마음을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결 했는데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고디까의 의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불교에서 자살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청정한 자의 자살은 묵인 되었다. 고디까의 자살, 박깔리의 자살, 찬나의 자살이 대표적이다. 마음이 오염된 상태에서의 자살과 다른 것이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 자결 했을 때 자신의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했다면 죽음의 사마시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죽음의 사마시시에 관한 인연담도 있다. 법구경 41번 게송 인연담인 ‘장로 뿟띠갓따 띳싸와 관련된 이야기(Putigattatissattheravatthu)’가 바로 그것이다.
장로 띳싸는 언제부턴가 그의 온몸에 겨자씨만한 크기의 종기가 생겼다. 주석에 따르면 “겨자씨만했던 것이 콩알만한 크기가 되고, 콩알만했던 것이 대두콩만한 크기가 되었으며, 대두콩만했던 것이 대추씨만한 크기가 되고, 대추씨만했던 것이 대추만한 크기가 되고, 대추만했던 것이 아말라까(amalka)만한 크기가 되고, 아말라까 만했던 것이 아직 익지 않은 칠엽수의 열매(beluvasalatuka)만한 크기가 되었으며, 아직 익지 않은 칠엽수의 열매만 했던 것이 칠엽수의 열매만한 크기가 되어 터져서 피와 고름을 흘렀다.”(DhpA.I.319-320)라고 했다.
장로는 죽음에 종기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부처님이 문병와서 가르침을 주었다. 부처님은 “의식은 그대를 떠나고 몸은 쓸모 없이 통나무처럼 땅위에 버려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시로서 “아, 머지않아 쓸모 없는 나무 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이 몸은 땅위에 눕혀지리라.”라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듣고 장로 띳싸는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고 열반에 들었다.
장로 띳사는 자신의 죽음을 관찰했다. 장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는 ‘죽음의 사마시시’에 해당된다.
사마시시는 경전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어느 논서나 주석서이든지 경전을 근거로 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은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마시시와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모든 형상에서 무상을 관찰하고 무상을 지각하고 무상을 경험하고 항상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마음으로 전념하면서 지혜로 깊이 통찰한다.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
이것이 사마시시 근거가 되는 경이다. 부처님은 무상을 관찰하면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고 했다. 번뇌의 종식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고 목숨의 종식은 완전한 열반을 의미한다.
수행하다 죽으면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다. 못 되도 가장 수승한 천상인 정거천에 태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즐기는 삶을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다 죽었을 때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시각, 청각 등으로 감각을 즐겼을 때 그 순간에 죽는다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후각, 미각, 촉각처럼 직접적인 감각은 어떠할까? 아마 더욱더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시각과 청각은 간접적인 것이다. 형상이나 소리를 접했을 때 지각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간접적 지각이 된다. 그러나 후각, 미각, 촉각은 직접적이다. 특히 촉각이 그렇다. 그래서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을 즐기다가 죽었을 때 지옥 아니면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다가 죽었을 때 왜 악처에 태어날까? 그것은 탐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감각을 즐기는 것 자체가 탐심에 따른 것이다. 천수경에서도 탐심에 대하여 ‘탐애중죄금일참회’라고 했는데, 탐심은 중죄에 해당된다.
여행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하다 죽을 가능성이 높다. 일년 대부분을 여행으로 보냈을 때 이는 즐기기 위한 여행이 된다. 그러나 구도여행은 다를 것이다. 끊임 없이 걷는 여행이라면 구도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탈 것을 이용한 여행은 즐기기 위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글 쓰는 사람은 글 쓰다가 죽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선업이 된다. 더구나 성찰하는 글을 쓴다면 글쓰기는 수행이 된다. 글쓰기는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범주에 해당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수행하다 죽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죽음, 가장 행복한 죽음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따른 “죽어도 좋아!”라며 죽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옥 아니면 축생에 난다고 했다.
공부하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수행하다 죽는 것을 최상이라고 행각해야 한다. 수행하다 죽으면 한꺼번에 두 가지가 성취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고 했다.
수행하다 죽으면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다. 못 되도 정거천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수행하다 죽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공부하다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하다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그것은 “모든 형상에서 무상을 관찰하고 무상을 지각하고 무상을 경험하고 항상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마음으로 전념하면서 지혜로 깊이 통찰한다.”(A7.16)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부처님은 늘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그것은 현재 상태를 잘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한다는 뜻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각각의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바로 일어나는 곳에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관찰해야 한다.”(Pps.V.1)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현재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를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 현재를 즐기는 사람은 감각을 즐기는 사람이다. 여행을 가는 것도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현지에서 오감으로 즐기는 것이다. 눈과 귀로는 유적지와 관광지, 풍광을 감상한다. 코와 혀로는 최상의 음식을 즐긴다. 몸으로는 신체적 접촉을 즐길 것이다.
현재를 즐기기만 한다면 감각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 탐욕으로 사는 것이 된다. 그 순간에 죽으면 지옥 아니면 축생이라고 했다. 감각만 즐기면서 살다가 늙었을 때 더 이상 감각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럴 경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생을 마감했을 때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신체 기관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껏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생 뭐 별거 있어?”라며 즐기는 삶을 산다. 그러나 즐기는 삶은 영원하지 않다. 더 이상 즐기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옛날을 회상하며 보낼 것이다. 마치 날개가 부러진 늙은 왜가리가 물이 마른 호숫가에 있는 것과 같다.
인생은 즐기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은 아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관찰해야 한다.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했다. 현재를 즐길 것인가 관찰할 것인가?
2022-08-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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