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악한 자가 잘먹고 잘사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15. 08:14

악한 자가 잘먹고 잘사는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새벽 같아라. 새벽을 사랑한다. 새벽에는 마치 흙탕물이 정화된 것처럼 맑은 정신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탐욕과 분노가 없다. 새벽에는 탐욕과 분노에서 자유롭다.

 

새벽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새벽시간은 명경지수와도 같기 때문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좋은 생각이 샘솟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흘러 가게 가만 놔둘 수 없다. 붙잡아야 한다. 글쓰기보다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새벽에 글을 자주 쓴다. 스마트폰 메모앱을 이용한 글쓰기를 말한다. 엄지로 친다. 그러나 엄지로 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생각이 글로 표현되는 것이 늦다. 이럴 때는 자판만한 것이 없다.

 

오늘 새벽 일찍 일어났다. 4시반에 일어난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파주에 있는 예래원 가는 날이다. 부모님이 모셔져 있는 납골당 공원이다. 삼남매 가족이 만나기로 했다.

 

예래원 가기 전에 글을 하나 써야 한다. 어제 맛지마니까야를 읽다가 좋은 생각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시간은 정해져 있다. 새벽에 엄지로 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일터로 달려 가서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다.

 

 

새벽 5시에 샤워를 했다. 일터에 도착하기 545분이 되었다. 아침을 먹지 않았으므로 편의점에서 천원짜리 삼각김밥 하나를 샀다. 커피를 만들었다. 절구커피를 말한다. 절구가 있어서 원두 콩을 넣고 절구질하여 만든 것이다.

 

글을 쓸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렇게 한참 자판을 두드리는 시각은 67분이다. 앞으로 한시간 반이내에 글을 완성해야 한다. 속도전이다. 나는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을까? 달려 보자.

 

 

 

머리맡에 맞지마니까야가 있다. 읽다 보니 거의 다 읽어 간다. 어제 읽은 것은 맛지마니까야 136번경인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이다. 152경 중에서 136번 경이니 89% 읽었다. 맛지마니까야 완독할 날이 머지 않았다.

 

왜 업에 대한 큰 경이라고 했을까? 여기서 크다라는 말은 마하를 뜻한다. 영어로는 ‘Great’가 된다. 마하는 크다라는 뜻도 있지만 위대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라고 했을 것이다.

 

업도 작은 업도 있고 큰 업도 있다. 작은 업은 쭐라깜마이고 큰 업은 마하깜마이다. 어떤 이유로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M136)이라고 했을까?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업의 가르침이다. 업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면 숙명론자가 된다. 자이나교의 숙명론이 대표적이다. 이는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모든 것이 전생 탓이라면 우리는 지금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어떤 일이 닥쳐도 전생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도 전생 탓이다. 사고가 나서 조금 다친 것에 대하여 다행이라 말하며 액땜한 것이라고 말해도 이는 숙명론적 사고방식에 해당된다.

 

숙명론자가 되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이는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숙명론은 대표적인 외도의 견해이다. 이는 업에 대하여 일부만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예 업을 무시하는 견해도 있다는 것이다. 존우화작설과 무인론이 바로 그것이다.

 

존우화적설은 오늘날 유일신교 교리와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는 것이다.

 

존우화작설은 자이나교의 숙명이라는 말 대신에 절대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자가 제일원인이 됨을 말한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건발생하여 형성되는데 어느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보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행복과 불행을 겪고 있는 자가 있다. 모든 것이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A3.61)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계를 어겨도 절대자 탓으로 돌릴 것이다.

 

최악의 견해가 있다. 그것은 무인론이다. 왜 무인론이 최악의 견해인가? 숙명론과 존우화작론은 조금이나마 원인과 결과라는 도덕적 행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그러나 무인론은 업 자체를 부인한다.

 

무인론은 행위와 결과라는 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무인론자들은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원인없이 조건없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무인론은 원인 없이 조건없이라는 말이 특징이다. 이는 인과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연기법도 부정한다. 연기법은 조건발생법을 말하는데조건없이라는 말은 연기법을 부정하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악의 견해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업의 가르침을 펼쳤다. 이는 행위와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또한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업의 가르침에 대하여 세간적 정견이라고 한다.

 

세간적 정견이 있다면 출세간적 정견이 있을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117번경 커다란 마흔의 경에 따르면, 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이다.”(M117.8)라고 했다. 그리고 출세간적 정견에 대해서는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는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이다.” (M117.9)라고 했다.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가 대표적이다. 번뇌를 끊은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반드시 출세간적 가르침만을 설한 것은 아니다. 세간에서 번뇌와 함께 사는 중생을 위해서도 법문을 설했다. 이것이 업자성정견(Kammassakadiṭṭhi), 즉 세간적 정견을 말한다.

 

업자성정견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견해를 말한다. 이는 깜맛사까딧티에서 사까(saka)라는 말이 ‘one's own’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을 보면 부처님은 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이것이 업자성정견이다. 세속에서 번뇌에 물들어 사는 중생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법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각각 생긴 모습이 다를까? 사람들은 왜 각각 성향이 다를까? 사람들은 왜 타고난 능력이 각각 다른 것일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단지 부모의 유전형질을 물려 받았다는 식으로 해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같은 형제 중에서도 능력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똑 같은 사람은 없다. 얼굴은 물론 성향도 그렇다. 일란성 쌍생아도 살펴 보면 다른 데가 있다. 이렇게 다른 것에 대하여 단지 유전자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업자성정견의 가르침으로 가능하다.

 

바라문 청년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바라문 청년은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M135)라고 물은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업을 소유하는 자, 업을 상속하는 자, 업을 모태로 하는 자, 업을 친지로 하는 자,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 이렇게 다섯 가지로 설명했다.

 

업의 가르침은 잘못 받아 들이면 숙명론이 되기 쉽다. 모든 것을 전생의 행위로 돌렸을 때 이 생에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당연히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도 없고 수행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은 무작설은 존우화작론과 우연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을 보면 이를 부수기에 충분하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업의 상속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말하는 업자성정견을 설했다. 그 중에 하나가 업의 상속자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업을 상속하는 자(kammadāyāda): 업의 소유자는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되는 상속자임과 동시에 현재의 업에 의해 새롭게 바뀌는 상속자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존재가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된다는 숙작인의 견해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KPTS, 2393번 각주)

 

 

업에 대하여 단지 주인으로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나는 업의 상속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기만 한다면 이는 숙명론이 된다. 나는 업의 상속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새로운 업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새로운 업을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자신의 미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업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은 미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소금덩어리의 경’(A3.99)에서도 확인된다. 죄악을 소금덩이로 보고 소금덩이와 같은 죄악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공덕을 쌓아야 함을 말한다.

 

맛지마니까야에 두 개의 업에 대한 경이 있다. 하나는 작은 경이라고 했고 또하나는 큰 경이라고 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이는 업에 대한 과보로 설명된다. 업에 대한 과보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업에 대한 작은 가르침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과보가 늦게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것이 업에 대한 큰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불교인들은 선인선과 또는 악인악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선한행위를 하면 선과보가 따르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즉각적으로 과보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선인선과 또는 악인악과라고 했을 때 이는 결정론적이고 운명론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치 기계적으로 즉각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선인선과와 악인악과의 가르침을 설했다. 맛지마니까야 도처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이나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이 대표적이다. 또한천사경의 경’(M130)도 있다.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을 보면 선인선과와 악인악과에 대한 것이다. 이는 살생을 일삼는 자에 대하여 만약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어떠한 곳에 재생하더라도 목숨이 짧습니다.”(M12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예가 있다. 보시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만약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어떠한 곳에 재생하더라도 빈궁합니다.”(M129)라고 말씀 하셨다.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은 선인선과 악인악과에 대한 가르침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반드시 따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마치 컴퓨터에 조건을 입력하면 즉각적으로 결과가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님을 말한다. 행위에 대한 과보는 익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M136)이 있다. 이 경을 읽어 보면 부처님의 파격이 보인다. 이제까지 알고 있는 상식을 부수는 것 같다. 한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이간질을 하는 것을 삼가고,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탐욕스러운 것을 삼가고, 분노하는 것을 삼가고, 올바른 견해를 갖더라도, 어떤 사람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본다.”(M136)

 

 

놀랍게도 이 가르침은 우리의 상식을 파괴한다. 선한 행위를 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선행을 했음에도 지옥, 축생과 같은 악처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부처님 가르침은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계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선행을 했다고 해서 바로 그 과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업에 대한 과보가 익으려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조건이 맞아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십선행을 해도 악처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선행을 하면 반드시 선처에 태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은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을 보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왜 그럴까? 이는 단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M136)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진리일지라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리를 버리지는 말라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지녀야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선인선과와 악인악과에 대한 것도 그렇다. 누군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M136)라고 말하면 진리에 대한 집착이 된다.

 

부처님의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을 보면 악행을 저지른 자도 천상에 날 수 있다고 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상식을 깨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난다여, 이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더라도,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면, 그 사람은 이전의 선한 행위로 인해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거나 나중의 선한 행위로 인해 즐거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거나 죽을 때에 올바른 견해를 갖거나 이룬 결과일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더라도, 그 과보가 현세에서 혹은 다음 세상에서 혹은 후세에서 나타나서, 그가 그것을 경험하게 된다.”(M136)

 

 

현세에서 악한 행위를 한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그가 과거 생에 선한행위를 한 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과거 생 언젠가 선한행위를 한 업에 대한 과보가 익었을 때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현생에서 저지른 악행이 면책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느 때인가 행위에 대한 과보가 무르익었을 때 결과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때 불행을 맛볼 것이다.

 

 

악행이 여물기 전까지는

어리석은 자는 꿀과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악행이 여물면,

어리석은 자는 고통을 경험한다.”(Dhp.69)

 

 

악행이 여물기 전까지는 꿀과 같다고 했다.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어리석은 자는 그 업이 꿀이나 단물처럼 탐나고 매혹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한 업은 현세에서나 미래에서나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악행에 대한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 한 꿀과 같은 행복을 누릴 것이다.

 

부동산 투기나 주식투기로 부자가 된 자가 있다. 갑자기 백만장자가 되었을 때 전생의 지은 공덕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불법과 탈법과 편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을 것이다. 불로소득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현재 누리고 있는 안락은 거기까지 이다. 이후에 어떤 과보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는 자도 잘 살 수 있다. 이는 과거 어느 생에선가 선업을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 찾아 먹으면 소멸된다. 마치 마일리지나 포인트가 소멸되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자는 불로소득으로 감각적 쾌락을 즐긴다. 마음껏 해외여행 다니면서 즐기는 삶을 살아 간다. 그러나 주석에 따르면 악행이 여물어 어리석은 자는 현세에서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내세에 지옥 등에서 고통받는다.”(DhpA.II.50)라고 했다.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분석의 큰 경을 읽어 보면 부처님 가르침은 파격적이다. 반드시 선인선과 악인악과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업이 달리 익기 때문이다.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업이 과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 행복하다고 하여 즐거워할 필요가 없다. 언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현재 불행하다고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언제 어느 때인가 선업공덕에 대한 과보가 익을지 알 수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사악처를 면한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디.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다. 아침 6시부터 치기 시작했는데 현재시각 84분이다. 거침없이 달려 왔다. 두 시간 동안 달렸다. 이제 글을 끝낼 시간이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하나의 글을 남겼다.

 

 

2022-08-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