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
부처님은 어떤 모습일까? 불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라마다 불상이 다르다. 그 나라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닮아 있다. 중국불상은 대체로 후덕한 이미지이다. 태국이나 미얀마불상은 우리 불상과는 달리 뾰족한 모습이다. 스리랑카 불상은 서구적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초기경전에는 부처님에 대한 묘사가 있다. 형상으로는 32상이 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브라흐마유의 경’에서 “존자 고따마는 땅에 적응해서 안착되는 발을 갖고 있습니다.”(M91)로 시작되는 32상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이것이 존자 고따마가 지닌 위대한 사람의 특징입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을 흠모하여 노래를 하나 만들었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전승되어 온 나라시하가타(Narasīhagāthā)가 이를 말한다. 인간사자의 노래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백수의 제왕 인간사자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아홉 게송에서 게송마다 후렴구로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ti)”라고 되어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사람들은 부처님을 모습을 보기만 해도 청정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목소리는 어떠할까? 부처님의 32상에서 28번째를 보면 “존자 고따마는 까라비까 새의 소리처럼 청정한 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M91)라고 했다.
부처님은 청정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했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D30)라고 했다. 부처님은 여덟 가지 목소리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심오한(gambhīro)’ 목소리는 어떤 상태를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단전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말한다. 단지 목의 떨림만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낭랑한(ninnādī)’ 목소리라고 했다. 이는 공명음, 즉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말한다. 이는 마치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Smv.640)라고 설명되어 있다.
설법할 때 부처님 얼굴만 바라 본 박깔리
부처님의 형성과 음성을 접하면 반하지 않을 사람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제자 중에 박깔리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부처님만 바라 보았다. 마치 학생이 선생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선생 얼굴만 빤히 바라 보고 있는 것과 같다.
선생은 자신이 하는 말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자신의 말 보다는 얼굴만 바라보는 학생이 있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죠?”라며 주의를 줄지 모른다. 부처님도 그랬다.
부처님은 자신의 형상과 음성에만 집착하는 박깔리에게 한마디 해 주었다.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S22.87)라고 말해 준 것이다.
금강경에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절의 원형이 니까야에 있다는 것이다. 몸을 보지 말고 진리를 보라는 것이다.
금강경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는 뜻이다. 이 말 역시 부처님을 형상과 음성으로만 접하지 말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시기라면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이 설법하면 청정하게 되어 모두 도와 과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시기라면 어떠할까? 이띠붓따까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잘 말해준다.
“수행승들이여, 만일 그 수행승이 일백 요자나 떨어져 살더라도, 그가 탐욕스럽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자극되지 않고, 마음에 분노가 넘치지 않고, 정신적으로 사유가 타락하지 않고, 새김이 마비되지 않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올바로 집중하고, 마음이 통일되고, 감각능력이 통제되면, 나는 그에게서 가깝고 그는 나에게 가깝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진리를 보기 때문이다. 진리를 보면, 나를 보는 것이다.” (It91)
부처님은 진리를 보면 나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반드시 부처님의 형상과 음성을 들어야만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접하면 진리를 보는 것이 된다. 오늘날 경전이 이를 대신할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dhammaṃ passati so maṃ passati, yo m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S22.87)라고 했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와 일치한다. 금강경 게송의 원형이 니까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 하나가 더 있다. 이는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 )”(M28)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했다. 이 말은 대승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니까야에서는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M28)에서만 등장한다.
부처님과 진리와 연기법은 동의어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했다. 연기라는 말은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조건발생을 뜻한다. 십이연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이 구절에 대하여 “연기를 보는 자는 조건적으로 생겨난 사실을 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사실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Pps.II.230)라고 했다.
연기는 조건 발생이다. 그래서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법이라고도 말한다. 어느 것이든지 홀로 발생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홀로 발생한 것이 있다면 창조주일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 위배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S22.87)라고 했다. 또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과 진리와 연기법은 동의어가 된다.
초기경전을 접하면 부처님을 접하는 것과 같다. 이는 진리의 몸으로서 부처님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몸을 ‘진리의 몸(dhammakāya)’이라고 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진리의 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몸은 부처님은 ‘진리의 몸(dhammakāya)’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몸(brahmakāya)’ ‘진리의 존재(dhammabhuta)’ ‘하느님의 존재(brahmabhuta)’라는 명칭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한역으로 법신(法身), 범신(梵身), 법성(法性), 범성(梵性)이라고 한다.
부처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
최근 에스엔에스에서 어느 페친(페이스북친구)이 예수의 사진을 공개했다. 전직 교수이기도 하고 목사이기도 한 페친은 백인모습의 사진, 중동사람의 모습의 사진, 흑인의 사진 등 네 장의 사진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예수는 중동사람이다. 오늘날 중동사람 이미지와 유사하게 생겼을 것이다. 이는 서양사람들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모습은 어떠할까?
맛지마니까야에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이 있다. 이 경에 부처님 모습이 나온다. 부처님이 마가다국으로 유행하다가 어느 옹기장이 작업장에서 하루밤 머물게 되었다. 작업장에는 유행자 뿍꾸싸띠도 있었다. 주석에 따르면 뿍꾸싸띠는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 했으나 구족계를 받지 않았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 유행한 것이다.
부처님은 옹기장이 작업장에서 뿍꾸싸띠와 하루밤을 보냈다. 그런데 뿍꾸싸띠는 부처님을 전혀 알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특징지우는 32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뿍꾸싸띠는 왜 부처님인 줄 몰랐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부처님은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위대한 사람의 특징을 감추고 일반 유행자처럼 옹기장이의 움막에 나타났다.”(Pps.V.33-34)라고 설명했다. 신통술로 32상을 감춘 것이다.
뿍꾸싸띠는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점에 대하여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는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본래 모습이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전인 2007년에 들은 것이다. 불교TV 사이트에서 강연한 것을 녹취해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아상가 교수는 불교학자이다. 대체로 학자들은 있는 사실만 말하는 것 같다. 불교도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상가 교수가 강조한 것은 인간적인 부처님이었다. 옹기장이 작업장에서 부처님은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이었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32상이다. 누가 보아도 부처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옹기장이 작업장에서 유행자 뿍꾸싸띠의 눈에 비친 부처님은 평범함 모습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오늘날 부처님은 신격화 되었다. 부처님이 마치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에게 기도를 한다. 마치 모든 소원을 들어 주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절대자가 아니다. 부처님은 단지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이다. 이는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하는 자입니다.”(M10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가이드, 안내자로서 부처님은 인간적인 부처님이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이다. 맛지마니까야 140번 경에서 부처님도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이다. 경만을 본다면 부처님의 형상은 일반사람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뿍꾸싸띠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말하는 자가 깨달은 자
옹기장이 작업장에서 두 명의 유행자가 함께 밤을 맞았을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아마도 대화를 했을 것이다. 두 명의 유행자도 대화 했다. 법담한 것이다. 그런데 대화를 하면 할수록 부처처님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깨달은 자가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깨달은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탐, 진, 치의 소멸이다. 그 다음으로 연기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정법을 아는 자, 연기법적으로 말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옹기장이 작업장에서 부처님도 연기법적으로 말했다.
뿍꾸싸띠는 어둠 속에서 한 유행자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부처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은 뿍꾸싸띠에게 여섯 가지 세계, 여섯 가지 접촉의 영역, 여섯 가지 정신적 경험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모두 연기법적으로 설명했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것이 있다. 어느 재가법사는 불교TV에서 ‘현존’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놀랍게도 미국의 어느 영성가의 책을 소개 했다. 경전과 무관한 것이다. 경전과 무관한 내용이다. 합일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재가법사의 강의는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현존의 상태를 이야기 했는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처럼 들렸다.
생각의 파도가 그를 덥치지 말도록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르침에 근거해서 말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적 가르침이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옹기장이 작업장에서 부처님은 뿍꾸싸띠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이여, ‘나는 있다.’라는 것은 생각입니다. ‘나는 이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나는 될 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나는 안 될 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나는 미세한 물질적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나는 물질을 지니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나는 지각을 지닌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나는 지각을 지니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나는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생각은 질병이고, 생각은 종기이고 생각은 화살입니다. 수행승이여, 모든 생각을 극복하면, 평화로운 성자라고 불립니다. 평화로운 성자는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동요가 없고 갈망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늙겠습니까? 늙지 않는데 어떻게 죽겠습니까? 죽지 않는데 어떻게 동요하겠습니까? 동요하지 않는데 어떻게 갈망하겠습니까?”(M140)
참으로 감동적인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오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이렇게 자판을 요란하게 두드리는지 모른다. 아직까지 한국불교 스님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나는 생각이다’고 했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지각하는 것이 모두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에 지배 받았을 때 번뇌가 생겨난다고 했다.
불교에 대해서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본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온에 대하여 연기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선사들이 언어의 부정을 통해서 나를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연기법적으로 나가 없음을 밝혀 냈기 때문이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면 생각도 내것이 아니다. 생각은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조건발생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생각에 대하여 ‘생각의 파도(maññussava: 想歓喜)’로 설명했다.
생각의 파도는 허황된 생각과 같다. 공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생각의 파도가 치지 말게 하라고 했다. 부처님은 “생각의 파도가 그를 덮치지 못하면, 그는 평화의 성자라고 불린다.” (M140)라고 했다.
망상이나 공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이 탐, 진, 치에 지배 받으면 망상이 생겨난다. 생각이 파도 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의 파도는 갈애, 자만, 견해에 따른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 생각의 파도가 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나의 것은 갈애에 대한 것이고, 나는 자만에 대한 것이고, 자아는 견해에 대한 것이다.
갈애와 자만과 견해에 의해서 생각이 파도친다, 그래서 부처님은 뿍꾸싸띠에게 “생각은 질병이고, 생각은 종기이고 생각은 화살입니다.”(M140)라고 말했다.
생각을 그치면 적정의 성자
요즘 유튜브에서 수많은 법문을 볼 수 있다.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올려 놓았다. 그러나 그런 견해가 정법인지 알 수 없다. 초기경전에 있는 부처님 가르침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대조해서 맞으면 수용해야 하지만 다르면 내쳐야 한다. 부처님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도 그렇다.
부처님은 뿍꾸싸띠에게 하루밤만에 수많은 가르침을 설했다. 경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아마도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늙겠습니까? 늙지 않는데 어떻게 죽겠습니까?”(M140)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불사의 경지에 이른 아라한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아라한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불사라고 한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일반사람들은 오온의 죽음과 함께 진짜 죽음을 맞지만,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아라한에게는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시설(施設)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사가 된다.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무아의 성자에게 죽음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불사가 된다. 불사이기 때문에 불생이 된다. 불생불사의 아라한에게는 오로지 평화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죽지 않는데 어떻게 동요하겠습니까? 동요하지 않는데 어떻게 갈망하겠습니까?”(M140)라고 말한 것이다.
생각을 그치면 평화로워진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완성된다. 탐욕과 욕망과 갈망, 그리고 분노와 악의와 증오, 무지와 미혹을 멈추라고 했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수행승에 대하여 최상의 적정의 기초를 갖춘 것이라고 했다. 생각의 파도가 그쳤을 때 “그는 적정의 성자라고 불린다.”라고 했다.
내가 속도전 하는 것은
오늘 아침 일터에 일찍 와서 신나게 두드렸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있는 맛지마니까야에서 읽은 것을 글로 표현하고자 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구절이다. 꼭 새기고 싶은 구절이다.
글로 남겨 놓으면 언제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활용할 수 있다. 블로그 검색창을 이용하여 다시 한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표절이다. 한번 써 먹었던 것을 또 한번 우려 먹는 것과 같다.
오늘 아침 6시 반에 일터에 도착했다. 지금 시각 9시 15분이다. 고객사 담당들이 출근할 시간이다. 9시 이전에 마쳐야 하나 오버 되었다. 그래서 9시 이전까지 글쓰기는 속도전이 된다. 자판소리가 요란할 수밖에 없다.
2022-08-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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