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 일상이 되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29. 07:44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 일상이 되었을 때


새벽시간이다. 새벽은 사색의 시간이다. 생각이 일어 났다가 흘러간다.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서 일어난다. 때로 마음이 마음의 대상이 될 때도 있다.

꿈에 왕따 당하는 꿈을 꾸었다. 오래 전의 일이다. 큰기업을 나와서 처음으로 사업을 했다. 자금을 모아서 회사를 하나 만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그가 대표이사를 맡았고 내가 이사를 맡았다. 처음에는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긴장과 갈등의 나날이 되었다. 돈 문제 때문이다.

회사를 3년만에 그만 두었다. 손해가 컸다. 금전적 손실도 컸지만 정신적 손실도 컸다. 내것이 아니었다. 돈도 잃고 세월도 잃고 사람도 잃었다. 좀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이다. 꿈에서 왕따 당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갑갑했다.

꿈도 현재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 시각대상을 보고서 의식이 생겨나듯이 꿈속의 일을 대상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마음이 갑갑한 것도 꿈속에서 일을 대상으로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럴 때는 대상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매일 암송하는 것이다. 25게송을 20분 가량 암송하고 나면 전혀 다른 기분이 된다. 기분이 상쾌해진 것이다. 대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기분전환 하는데 있어서 쓰기, 읽기, 외우기, 암송하기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기분전환 하고자 한다. TV나 영화, 유튜브가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전환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직접 해보지 않고 편하게 즐기는 것이 되었을 때 또 다른 번뇌가 생겨난다. 여행을 하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먹어 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써 힘들게 해서 얻어 내야 한다. 이에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읽기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글쓰기에 비하면 아주 약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요청된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가지면 게을러지기 쉽다. TV시청이나 유튜브시청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는 누구나 할 수 없다. 글쓰기 같은 것이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쓰기를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일상이다. 밥 먹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매일 쓰다보니 일상이 된 것이다. 이런 글쓰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에는 글쓰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우기와 암송하기도 있다.

외우기와 암송하기도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쓰기는 가능하지만 외우기와 암송하기가 일상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에너지가 과도하게 소모되기 때문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에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힘이 드는 것이다. 글쓰기 보다 힘이 드는 것은 암송하는 것이다. 이미 외운 것을 기억을 되살려 읊어 보는 것이다. 결심이 있어야 한다. 암송하기로 마음을 먹어야 할 수 있다. 그래서 힘이 든다.

암송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외우는 것이다. 하나의 경을 외우기 위해서는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한다. 반드시 외우고 말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하루나 이틀에 매일 한게송씩 외우고자 마음을 내어야 외울 수 있다. 이런 것도 결정바라밀일 것이다.

요즘 나의 일상은 확대 되었다. 글쓰기를 넘어서 읽기와 외우기, 암송하기로 확대된 것이다. 모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빙식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읽기가 왜 일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인가? 그것은 머리맡 읽기이기 때문이다.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열어 보기 쉽다. 독서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머리 맡에 둔 것이다. 읽기를 일상화 하기 위해서 머리맡에 둔 것이다. 그렇다고 진도에 연연하지 않는다. 욕심 부리지 않고 하루 한경 읽기를 하고 있다.

축적의 힘은 무섭다. 피로가 누적되면 죽음에 이른다. 은행에 적금을 하면 나중에 큰 돈이 된다. 하루 한경씩 매일 읽다보면 방대한 경전도 어느 날 보면 진도가 꽤 나가 있다. 머리맡 맛지마니까야도 그렇다. 152경에서 101경까지 읽었다. 3분의 2를 읽은 것이다.

요즘 맛지마니까야 진수를 맛보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하늘과 땅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접했을 때 인식의 한계를 느낀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된다. 또한 새겨 두고 싶은 것이 많다. 글쓰기 소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읽기는 일상이 아니었다. 초기불교에 심취하다 보니 다른 책은 눈에 차지 않았다. 고전이 좋다고 하지만 초기경전과 비교된다. 고전 중의 고전은 니까야로 본다. 그러다 보니 제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도 시시하게 보인다. 이것도 자만일 것이다.

과거에 책을 많이 보았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았다. 책을 사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려 보기도 했다. 천권은 된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읽어도 만족하지 않았다. 청청도론 한권 읽는 것만 못했다.

수많은 독서모임이 있다. 철학서적도 있고 현대물리학과 관련된 모임도 있다. 사회과학 서적과 관련된 모임도 있을 것이다. 물론 종교서적 모임도 있을 것이다.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담마만한 것이 없다. 청정도론 한권 읽고 나면 다른 것은 빛바래는 것 같다.

청정도론은 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가 편집한 것이다. 청정도론은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러나 니까야를 따라 갈 수 없다. 부처님 원음이 실린 나까야말로 고전중의 고전이고 시대를 초월한 것이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니까야는 누군가에게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니까야 읽기를 생활화 하고자 한다. 머리맡에 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쓰기와 읽기에 이어서 외우기와 암송하기도 생활화 하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서 생활화는 일상을 말한다. 쓰기, 읽기, 외우기, 암송하기가 일상이 되려면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하루 한개 이상 쓰기가 되고, 의무적으로 한개 이상 경을 읽기가 되고, 의무적으로 하루나 이틀에 게송을 외우기가 되고, 의무적으로 외운 경을 하루 한번 이상 암송하기가 된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많다. 쓰기, 읽기, 외우기, 암송하기에 이어서 책만들기를 하고 있다. 한달에 의무적으로 4-5권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 써 놓은 글을 모아서 책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출간하는 것은 아니다. 피디에프(PDF)파일을 만들어 블로그에 올려 놓는 것이다. 누구든지 다운 받아 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이렇게 본다면 블로그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나의 글을 전파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된다.

이제 6시가 되었으니 오늘도 하루일과가 시작되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 왕따 당해서 기분이 언짢았지만 빠다나경을 암송함으로써 극복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치다보니 전혀 다른 기분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쓰기와 읽기, 외우기, 암송하기는 일상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될 것 같다. 쓰기와 읽기, 외우기, 암송하기와 같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 일상이 되었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2022-06-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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