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선생을 추모하며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다. 일각이 여삼추인 자에게도 밤은 길다. 꿈이 많은 자에게도 밤은 길다.
꿈을 꾸었다. 대개 갑갑한 꿈이다. 아름다운 꿈은 드물다. 꿈 속에서 헤매다 보면 밤이 길다. 그런 꿈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이 있는 한 안심이다. 거기에는 궁금한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을까요?" 이 질문은 한달전 작고한 S선생 아들이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암투병 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어디로 가셨는지 몹시 궁금해 하는 것 같다. S선생은 어디로 갔을까?
니까야를 보면 내생에 대한 질문을 종종 볼 수 있다. 수행승이 죽었을 때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답해 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부처님은 일체지자이기 때문이다.
수행승 고디까는 자결했다.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가 일곱번째로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칼로 힘줄을 끊은 것이다. 수행승 고디까는 어디로 갔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갈애를 뿌리째 뽑아서 열반에 들었다.”(S4.23)라고 말했다.
열반이란 무엇일까?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완전한 열반이다. 불사이며 불생인 열반을 말한다. 둘째, 상수멸의 열반이다. 일시적인 열반의 상태이다. 셋째,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이다. 모든 오염원이 소멸 되었을 때 열반의 상태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고디까의 죽음에 대하여 열반이라고 했다. 이때 열반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4.23)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열반은 의식이 머무는 것이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있다. 마음이 없으면 세상도 없다. 여기서 마음이란 무엇일까? 십이연기에서 식, 빈냐나를 말한다. 마음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식은 형성을 조건으로 생겨난다.
형성은 의도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업이라고도 한다. 빠알리어로는 상카라이다. 업이 있어서 식이 있게 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해서 업이 있게 된다. 업을 조건으로 식이 생겨나는데 죽음과 관련하여 이를 재생연결식이라고 한다.
재생연결식은 업을 조건으로 한다. 조건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크게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업과 업의 표상과 태어날 곳의 표상을 말한다.
마음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생겨난다. 마음의 대상이 없으면 마음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도 마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임종순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임종순간에 어떤 생각이나 어떤 표상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데, 그 마음이 다음 생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바왕가찟따라 하여 한 존재를 일생동안 지속케 하는 마음이 된다. 이를 존재지속심이라고 한다.
한 존재의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것은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라고 했다. 임종순간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서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대상으로 마음이 생겨나는데, 이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한다. 다음 생의 첫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첫마음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지속심이라고 한다.
존재지속심은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날 때 일생동안 지속되는 마음이다. 태어날 때 마음과 임종 때 마음은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으로 일생을 살고, 개로 태어나면 개로 일생을 살게 된다. 도중에 바뀌는 일은 없다.
한번 나로 태어나면 나라는 존재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 도중에 또 다른 나가 되는 일은 없다. 그런 나가 있다면 죽어서나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관습적 표현이다. 오온으로 설명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나를 나이게끔 해 주는 것은 존재지속심, 즉 바왕가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왕가의 마음은 재생연결식에서 부터 마지막 죽음의 마음까지를 말한다. 한 존재의 죽음은 존재지속심의 마지막 마음이 된다. 마지막 죽음의 마음은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이 생겨나는데 이를 재생연결식이라고 한다. 이때 이전의 죽음의 마음과 이후의 재생연결식은 다른 마음이다. 다른 마음이라는 것은 다른 존재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존재지속심이 된 것이다.
재생연결식은 죽음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끝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죽음이 있으면 탄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나 영혼이 몸만 바꾸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을 연결해 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다.
흔히 업생이라고 말한다. 이는 업이 윤회함을 말한다. 마음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윤회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한 존재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은 한 존재의 존재지속심의 최후의 마음이다. 이 마지막 마음이 다음생에도 그대로 간다면 아뜨만 윤회가 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십이연기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S12.2)라고 했다. 여기서 형성, 즉 상카라는 업을 말한다.
존재는 존재지속심의 연속이다. 존재지속심과 존재지속심을 연결하는 것은 업이다. 업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윤회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변치 않는 자아가 있어서 윤회한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중유를 말하기도 한다. 이 생과 저 생의 중간적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49일 머물다가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티벳사자의서가 있다. 한때 심취했었다. 블로그 초창기 때 이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버렸다. 왜 버렸는가?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중유, 죽음과 삶의 중간적 존재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S12.2)라는 가르침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부처님은 조건발생적인 연기법을 설했다. 사람이 죽으면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데 업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종순간에 마지막 죽음의 마음은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데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 "형성(업)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라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런데 조건발생하는 것에 있어서는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유가 설자리가 없음을 말한다. 이번 생과 다음 생의 간극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 생의 죽음의 마음에서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은 무간이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두 마음 사이에는 업만 있을 뿐이다. 마치 문을 여는 것과 같다. 문 안쪽은 이 생이지만 문 바깥쪽은 다음 생이 있는 것과 같다. 청정도론에서는 "나무에 묶인 밧줄에 의지하여 수로를 뛰어넘는 것처럼"(Vism.17.163)이라고 밧줄의 비유로 설명했다.
어느 법회모임에서 티벳사자의 서를 교재로 선택했다. 스님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다. 티벳사자의 서에서는 중유를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달라이라마도 인정하고 있다.
어제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달라이라마가 말하는 것을 보았다. 황경환 선생이 달라이라마와 대담한 것을 본 것이다.
황경환 선생은 달라이라마에게 중유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이에 달라이라마는 중유가 있다고 말했다. 욕계에서 욕계로 갈 때는 중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색계나 무색계로 갈 때는 필요치 않다고 했다. 상당히 놀라웠다. 또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중유가 있을 수 없다.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면 무간이 되기 때문이다. 찰나지간에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달라이라마가 욕계에서 욕계로 갈 때 중유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티벳사자의 서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라고 보는데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조건발생하는 것에는 간극이 없다. 무간이다. 이는 화생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태생과 난생과 습생이 아닌 것 모두는 화생으로 태어난다. 인간과 축생을 제외한 천상, 아수라, 아귀, 지옥의 존재는 화생하는 것으로 본다.
화생하면 즉각 태어난다. 마치 꿈꾸다가 아침에 번쩍 눈을 뜨는 것과 같다. 영화에서 장면이 바뀌는 것과 같다.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중유의 존재가 설 자리가 없다.
귀신은 있을까? 이에 대해서 어떤 스님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뱀장어이론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분명하게 말했다. 맛지마니까야 100번 경에서 봤다.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바라문은 "존자 고따마여, 신들은 있습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바라드와자여, 누군가 '신들은 있는가?'라고 질문을 받고 '신들이 있다.'라고 대답하거나 혹은 '나에게 홀연히 신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라고 대답하더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신들이 있다.'라는 결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M100)
부처님은 신들이 있다고 했다. 당연히 귀신도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귀신은 야차나 아귀와 같은 저급한 존재의 신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홀연히"라는 말이다. 이 말은 화생을 뜻한다.
인간과 축생을 제외하고 홀연히 태어나는 존재들이 있다. 색계와 무색계 천신도 화생하고 욕계천신도 화생한다. 지옥중생도 화생한다. 화생에는 간극이 없어서 무간이다. 죽으면 업에 따라 즉각 화생한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업에 따라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나의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읽어 ‘이 세계에서 그 사람이 죽을 때, 그는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나는 분명히 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의 마음이 사악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세계의 어떤 뭇삶이 사악하다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It.12)
지옥을 예로 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 세계에서 그 사람이 죽을 때, 그는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말이다. 그것이 작용한다는 것은 업이 작용함을 말한다.
선인선과이고 악인악과이다. 업대로 살고 업대로 태어난다. 그래서 이띠붓따까 주석에 따르면 “조건이 화합하여 그 사람이 순간적인 포착의 인식과정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죽을 때, 옮겨진 대로, 가져와서 놓인 대로,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 지옥에 놓이게 된다.” (It.A.72) 라고 했다.
그 사람은 어디에 태어났을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악업을 지었다면 악처에 날 것이다. 선업을 지었다면 선처에 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It.A.72)라고 했다. 이 말은 "그는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yathā bhataṃ nikkhitto)"(It.12)라는 말과 같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저 세상으로 가는데 있어서 간극은 없다. 이 생에서 한 존재의 존재지속심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은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것의 표상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또 다른 존재의 존재지속심의 처음마음인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데 이때 간극이 없다는 것이다. 무간이다. 중유의 존재가 있을 수 없다. 천상의 존재나 지옥의 존재로 태어난다면 마치 잠에서 깨어 눈을 번쩍 뜨는 것과 같지 않을까?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한평생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악업이 된다. 왜 그런가? 탐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이는 아라한의 인생관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5)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소멸한 자이다. 번뇌가 소멸했다는 것은 자아의식도 소멸했음을 말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무욕의 아라한은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다. 무아의 성자는 불사이고 불생이다. 그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날까지 사띠하는 것이다.
S선생은 어디로 갔을까? S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것과 다름 없다. S선생은 한평생 무욕으로 살았기 때문에 좋은 곳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어쩌면 불사불생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S선생과 짧은 만남이었지만 선생이 남긴 메세지는 강렬했다. S선생을 추모하며.
2022-07-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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