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욕망에서 해방되는 삶을
새벽시간을 사랑한다. 흙탕물이 정화된 것 같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일상을 살다보면 마음이 오염된다. 저녁에 어둠이 깔리면 혼탁한 마음이 된다. 보상심리가 발동되어 욕망을 충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악마의 영역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몸에 대한 새김을 닦고 익히지 않으면 악마가 그 기회를 얻고 악마가 그 대상을 얻는다."(M119)
맛지마니까야 '몸에 대한 새김의 경'(M119)에 실려 있는 말이다. 몸에 대한 새김은 몸관찰하는 것이다. 신, 수, 심, 법 사념처에서 신념처에 대한 것이다. 잠시라도 사띠하지 않으면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음을 말한다.
오후가 되면 나른하다. 점심을 먹고 나면 집중도 되지 않고 일의 능률도 떨어진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을 때 졸립다. 이런 때 슬쩍 잠이 든다. 잠이 들락말락할 때 최상의 행복을 맛본다. 선정이 이런 것 아닌지, 열반이 이런 것 아닌지 생각해 본다. 왜 그런가? 욕망이라는 번뇌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잠을 잘 자고 나면 개운하다. 삶의 활력이 생겨나고 새로 태어난듯 하다. 그런 한편 예전의 상태를 돌아 보게 된다. 욕망의 마음에 지배 받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도 회광반조인지 모른다.
“1) 다시 말해서 그는 “실로 나는 이 길로 달려왔다.”라고 길을 성찰하고, 2) 그 다음에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고 경지를 성찰하고, 3)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끊어졌다.”라고 제거된 오염을 성찰하고, 4) 그 다음에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상위의 세 가지 길을 통해 끊어야 할 오염을 성찰한다. 5) 마지막으로 “나는 진리를 대상으로서 꿰뚫었다.”라고 불사의 열반을 성찰한다. 이와 같이 고귀한 제자인 흐름에 든 님에게는 다섯 가지 성찰이 있다.”(Vism.22.20)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도와 과를 이루는 순간에 대한 것이다. 도와 과를 이루려면 반드시 열반체험을 해야 한다. 열반체험을 하고 나면 반조가 있게 되는데 반조에 대한 설명이다.
열반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열반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각이 소멸 되었으므로 열반의 상태를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다. 지각을 뜻하는 산냐는 언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반의 상태는 느낄수 없다. 그럼에도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고 했다. 사리뿟따 존자도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고 했다. 열반은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왜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해서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다.
열반은 상수멸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열반의 상태는 느낌과 지각이 소멸되어서 알 수 없다. 열반은 느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열반에 대하여 최상의 행복이라고 한 것은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라는 역설이 통하는 것이다.
열반은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열반의 순간에는 몸도 마음도 사라진다. 가장 먼저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사라진다. 2선정에서 일어난다. 그 다음에는 호흡이라는 신체적 형성이 사라진다. 4선정에서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지각과 느낌이라는 정신적 형성이 사라진다. 8번째 선정인 상수멸정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이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 차례로 사라지면 열반의 상태가 된다. 결국 몸과 마음이 사라진다. 몸과 마음이 사라진 상태가 열반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열반의 상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다만 깨어 났을 때 이전과 이후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반조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고 아는 것이라고 했다. 5가지 성찰중에서 4번째에 해당된다.
열반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성찰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반조에 대한 것이다. 이전과 분명히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번뇌와 관련된 것이 그렇다.
자신의 상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도와 과를 이루었을 때 누군가 인가해 주는 것이 아니다. 열반을 체험 했을 때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자신이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어떤 번뇌가 끊어졌는지, 자신에게서 아직도 남아 있는 번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 이는 "실로 나는 이 길로 달려왔다.”라고 길(도)을 이룬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라고 경지(과)를 이룬 것을 알게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든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물론 자신에게 끊어진 번뇌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열반에서 나오면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끊어졌다.”라는 반조가 있게 된다. 또한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라는 반조도 있게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남은 생은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의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든 경지의 수다원을 견도라고 하고,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다함과 아나함의 경지에 대하여 수행도라고 한다. 마침내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했을 때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이를 무학도라고 한다.
나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얼마나 될까? 무수히 많다. 하루종일 탐, 진, 치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번뇌에서 자유로울 때도 있다. 잠에서 깼을 때이다. 일시적으로 번뇌에서 해방되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또 하나는 막 잠들락말락 할 때이다. 점심때 포만감으로 졸릴 때도 해당된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어떤 번뇌도 끼여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열반의 길은 누구나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열반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길은 있다. 니까야에서는 열반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몸에 대한 새김의 경'(M119)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머리맡에는 맛지마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열어본다. 오늘 새벽에는 몸관찰에 대한 것을 보았다. 놀랍게도 호흡관찰도 몸관찰에 해당된다. 왜 그런가? 호흡관찰은 신체적 형성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밖에 몸관찰에 대한 것으로 행주좌와에 대한 것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안다."라고 했다. 일상에 대한 것도 있다. 대소변도 해당될 것이다. 이때에는 "올바로 알아차린다."라는 표현을 했다. 몸의 32가지 기관에 대해서는 "오물이 가득한 것으로 관찰한다."라고 했다. 시체에 대한 10가지에 대해서는 "몸에 대한 새김을 닦는다."라고 했다.
신, 수, 심, 법 사념처 중에서 몸관찰이 가장 기본이다. 호흡도 몸관찰에 해당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를 관찰하라고 하는데 복부관찰도 몸관찰에 해당된다. 사대 중에서 풍대를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관찰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는 시체관찰에서 "이 몸도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이와 같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M119)라며 자신의 몸과 비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했을 때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M119)라고 했다.
경에 따르면 몸에 대한 새김을 익혔을 때 10가지 공덕이 있다고 했다. 가장 첫번째 공덕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것은 쾌와 불쾌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쾌와 불쾌를 극복한다. 불쾌가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게 하고 불쾌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한다."라고 했다. 이 말은 악마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은 제어하지 않으면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그래서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다섯 가지 감각을 즐기는 것이 탐욕이다. 감각을 즐긴다는 것은 욕망에 지배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구든지 몸에 대한 새김을 닦고 익히지 않으면 악마가 그 기회를 얻고 악마가 그 대상을 얻는다."(M119)라고 했다.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면,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Ud.66)
우다나에 실려 있는 수수께끼같은 게송이다.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열반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 구절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Ahu pubbe tadā nāhu)”는 어떤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거룩한 길과 관련된 앎이 일어나기 전에 일체의 탐욕 등의 오염원이 나에게 존재했는데, 그러나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에 그 오염의 무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조금이라도 오염이 남아 있다면, 최상의 길에서 버려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UdA.337)라고 했다.
두번째 구절을 보면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nāhu pubbe tadā ahu)”라고 했다. 이는 “이 나의 무수한 죄악의 여읨은 지금 수행을 통해서 닦여져 원만하게 되었지만,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 이전에는 없었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최상의 길에 대한 앎이 생겨나자, 그 모든 나의 죄악의 여읨은 완성되었다. 최상의 길을 성취함으로써 일체의 모든 것을 아는 덕성이 깨달은 님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UdA.337)라고 했다.
세번째 구절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면 (Na cāhu na ca bhavissati)”은 어떤 뜻일까? 이는 “죄악을 여의는 고귀한 길이 나의 보리수 아래에서 생겨났다. 그것을 통해 모든 오염원의 무리들은 남김없이 제거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길은 길에 들어서는 순간의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고귀한 길을 통해서 내가 버려야하는 오염들이 없어졌으므로, 그 오염들처럼 길도 없어지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UdA.337)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na cetarahi vijjatī)”에 대한 뜻풀이이다. 이는 “지금 현재에 있지 않다. 즉, 내가 행해야 할 일이 없으므로 인식되지 않는다.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UdA.337)라고 했다.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번 열반을 체험해서 도와 과를 이루면 퇴전하지 않음을 말한다. 뱉은 음식을 다시 삼킬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범부들은 뱉은 음식을 다시 주어 먹는 것 같다.
잠에서 깰때 마음은 청정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오후에 졸려서 잠들려 할 때 순간적으로 최상의 행복을 맛본다. 일종의 유사선정, 사이비열반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번뇌에서 해방된다. 졸린 상태에서 깼을 때 욕망에 지배된 마음을 부끄러워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반조일 것이다. 그러나 때 뿐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은 욕망을 즐기는 삶과 같다. 감각을 즐기면 고통과 괴로움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즐기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번뇌에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토한 음식을 다시 먹는 것과 같다. 나는 언제나 욕망에서 해방되는 삶을 살아갈까?
2022-07-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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