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물폭탄으로 초토화된 안양천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9. 09:36

물폭탄으로 초토화된 안양천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그러나 집에서는 잘 모른다. 잠 잘 때 창을 닫아 놓고 자면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잘 모른다. 요즘 아파트 창은 페어글라스에 이중유리창이기 때문에 안전하기가 마치 성벽과도 같다.

 

비가 밤새도록 온 것을 보니 안양천이 바다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런 조짐은 있었다. 어제 저녁 늦게 귀가했는데 그야말로 비가 억수로 쏟아 졌다.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큰우산을 썼지만 머리만 보호될 뿐이었다. 신발이 몽땅 젖었다. 이런 비는 몇십년만에 처음인 것 같다.

 

오늘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갔다. 일터로 가는 길에 안양천을 건너야 한다. 학의천과 만나는 쌍개울의 안양천이고 비산사거리 근처에 있는 안양천이다.

 

안양천에 도착하니 예상이 들어 맞았다. 둑방까지 물이 찬 흔적이 보인다. 둑방을 넘으면 저지대는 침수될 것이다. 다행히도 둑방 바로 전에서 멈춘 것 같다.

 

 

 

징검다리는 보이지도 않는다. 아래쪽 무지개다리쪽으로 향했다. 아치 모양의 무지개 다리에는 오물이 잔뜩 끼여 있다. 나무가 휩쓸려 내려와 걸쳐져 있다.

 

다리 턱밑에까지 물이 차올랐다. 물살은 거세다. 어느 정도일까? 다리 난간이 넘어갔다. 쇠붙이로 된 난간이 물의 힘으로 옆으로 누운 것이다.

 

 

하천 주변에 있는 나무는 모두 쓰러져 있다. 어느 것은 뿌리가 뽑혀져 있다. 마치 폭격을 맞은듯 처참한 모습이다. 쇠기둥으로 된 그늘막도 파손되어 넘어져 있다. 하천 주변이 초토화된 듯 하다.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오로지 꽃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격류가 잠든 마을을 휩쓸어 가듯,

악마가 그를 잡아간다.”(Dhp.47)

 

 

격류가 잠든 마을을 휩쓸어 간다고 했다. 꽃들을 따는데 정신이 팔렸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다. 시각, 청각 등 오감으로 즐기는 욕망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폭류로 비유했다. 그래서 탐욕은 커다란 거센 물결이라고, 열망은 그 흡인력이라고, 집착은 그 혼란이라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그 넘기기 어려운 수렁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tn.945)라고 했다.

 

잠자는 마을에 폭류가 덮친다고 했다. 커다란 격류가 마을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 버리면 집은 파괴되고 가축은 떠 내려가고 사람도 떠내려 가게 될 것이다. 떠내려가서 어떻게 될까? 물에 사는 생명체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잠만 자고 있을 것인가?

 

 

“일어나서 앉아라.

잠을 자서 너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화살에 맞아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자에게

잠이 도대체 웬 말인가.”(Stn.331)

 

 

잠든 사이에 급류에 휩쓸려 갈 수 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잠을 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화살을 맞은 자가 잠만 잘 수는 없는 것이다. 탐욕의 화살, 성냄의 화살, 어리석음의 화살, 자만의 화살, 견해의 화살을 말한다.

 

대승경전에 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가 있다. 강 기슭의 나무와 우물안 등나무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니까야에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일까?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강이 산에서 발원하여 하류로 흐르고 멀리 흐르며 급류를 이루었는데, 그 양쪽 강둑에 갈대가 생겨나 그 둑에 매달려 있다면, 꾸싸 풀도 생겨나 그 둑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골풀도 생겨나 그 둑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비라나 풀도 생겨나 그 둑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나무들도 생겨나 그 둑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급류에 휩쓸려 갈대를 붙잡았으나 그것이 부서지면, 그 때문에 그는 불행과 재난에 떨어진다. 꾸싸 풀을 붙잡았어도 그것이 부서지면, 그 때문에 그는 불행과 재난에 떨어진다. 골풀을 붙잡았어도 그것이 부서지면, 그 때문에 그는 불행과 재난에 떨어진다. 비라나 풀을 붙잡았어도 그것이 부서지면, 그 때문에 그는 불행과 재난에 떨어진다.”(S22.93)

 

 

상윳따니까야 강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우기가 되어 비가 억수처럼 내렸을 때 폭류가 될 것이다. 폭류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 버린다. 강이 범람하면 마치 폭격 맞은 듯 초토화된다. 이와 같은 폭류에 어떤 사람이 풀에 의지하고 있다. 마치 안수정등이야기에서 흰쥐와 검은쥐가 갉아 먹고는 있는 등나무 줄기를 붙들고 있는 것과 같다.

 

풀은 격류에 사람의 몸을 지탱해 주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풀이라도 붙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도 위험하다. 폭류가 휩쓸어 버리면 나무이건 사람이건 모두 휩쓸려가 버린다.

 

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물질은 부서지고 만다. 그 때문에 그는 불행과 비참함에 떨어진다.”(S22.93)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온이라는 끈을 잡고 있다. 오온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강둑에 매달린 풀 한포기를 붙잡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치 안수정등이야기에서 등나무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

 

풀은 약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풀을 붙잡고 있지만 급류에 풀은의지할 것이 못된다. 오온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급류에서 풀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다. 오온이 무상한 것임에도 이를 나의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결국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 물고기의 밥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요즘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공중파 채널이나 뉴스전문 채널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이는 뉴스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고 기자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다.

 

기자나 검사나 똑 같은 사람들이라고 본다. 검사는 수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기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을 한다. 기자 역시 어떤 기사를 낼 것인지 판단을 한다. 그런 판단에 시청자는 놀아 나는 것 같다. 기자의 기사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에스엔에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본다. 이번 폭우가 재난 수준임을 알았다. 이는 안양천이 범람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행이 제방을 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비가 내렸더라면 둑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본 안양천 주변은 처참했다. 하천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는 모조리 쓰러져 있다. 이제까지 십년 이상 매일 이 길을 다녔지만 이렇게 나무가 모두 쓰러진 것을 보지 못했다.

 

무지개다리 난간도 쓰러져졌다. 다리를 건널 때 물이 턱밑에 까지 미쳐서 도중에 다리가 무너질까도 염려했다. 철제기둥으로 된 그늘막도 쓰러졌다. 물의 힘을 보았다. 폭류, 급류로 인하여 안양천변이 초토화 되었다.

 

 

사람에게도 폭류가 있다. 감각적 욕망이 폭류이다. 한번 감각적 욕망에 휩쓸리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린다. 남는 것은 폐허밖에 없다. 처참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감각적 욕망의 폭류에 휩쓸려 간다. 결국 물고기의 밥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폭류에 휩쓸려 가지 않을까? 그것은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조건발생하여 소멸하는 것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그저 지켜만 보면 된다. 그러면 사라진다. 생겨나는 데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사라지는 데는 조건이 필요 없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붙잡고 있고자 한다면 마치 급류에 풀 한 포기를 잡고 버티는 것과 같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존재의 다발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이 무상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서 해탈해야 한다.

 

 

2022-08-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