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19. 09:42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것은

 

 

세상에 하찮은 것이 있다. 하찮은 것에 대해서는 개자를 붙여 준다. 나리를 개나리라고 하고, 복숭아를 개복숭아로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개자 붙는 것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말로 개새끼를 들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눈길이 계속 머문다. 할머니는 아기를 보며 장난을 한다. 말도 못하는 아기와 대화하면서 계속 눈을 맞추며 말을 하는 것이다. 할머니에게 아기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여운 존재가 된다. 마치 눈에 넣을 듯 애정을 갖는다.

 

할머니들은 강아지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할머니는 손자가 찾아 왔을 때 우리 강아지 왔는가?”라며 반겨준다. 아이가 강아지가 된 것이다. 아이의 이미지가 강아지와 유사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새끼 강아지를 말한다.

 

여기 새끼 강아지가 있다. 크면 징그럽지만 새끼 때는 귀엽다.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 그러나 그 때 한때뿐이다. 강아지 새끼가 급속도로 성장함에 따라 새끼 때의 맛은 잃어 간다. 그때쯤 되면 개가 되는데 때로 개새끼라고도 말한다.

 

세상에 여러 가지 욕이 있다. 욕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입에 오르는 욕이 있다. 그것은 개새끼라는 욕이다. 사람들은 욕을 할 때 왜 개새끼라고 할까? 아마도 가장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미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껏 낮추어 내 뱉는 말이다.

 

에스엔에스에서 강아지 동영상을 보고

 

에스엔에스(SNS)에서 강아지 동영상을 보았다. 며칠 전부터 강아지 출산을 예고 했었는데 마침내 출산을 한 것이다. 새끼 여러 마리가 어미 개의 젖을 빨기 위해서 구물구물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영상이나 사진을 보았을 때 짠한 생각이 든다.

 

새끼 개들을 보면 귀엽다. 그러나 동시에 불쌍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댓글에 어쩌다가 축생으로.”라며 글을 남겼다.

 

개새끼들은 어쩌다 축생으로 나게 되었을까? 수많은 탄생이 있지만 왜 하필이면 개의 운명으로 태어났을까? 만약 개가 의식이 있다면 어느 날 개로 태어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얼마나 한심한 느낌이 들어갈까?

 

한번 개로 태어나면 개로서의 일생을 보내야 한다. 개가 도중에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죽어서나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으로 일생을 보내야 한다. 사는 도중에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죽어서나 가능하다. 이 모습 이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이 모습 이 성향을 간직한 채 일생을 보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개의 일생이나 사람의 일생이나 똑같다.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를 말한다. 사람이 개가 되기도 하고 개가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자신의 지은 행위와 관련이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저지른 행위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불교는 업의 종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업과 업보의 종교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즉각적인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니다. 행위에 대한 업이 익어야 한다. 그래서 현생에서 받는 과보가 있고, 다음생에서 받는 과보가 있고, 미래생에서 받는 과보과 있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

 

나는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태어나보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의식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러나 개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 개는 언어적 능력이 없어서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강아지를 보면 귀엽다. 모든 새끼는 귀엽다. 그러나 개새끼는 자신이 어떻게 개의 운명으로 태어났는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개의 일생을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개의 운명으로 태어나면 좀처럼 개의 운명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이다. 맹구우목의 비유가 니까야에 있는 것이 놀랍다. 맹구우목의 비유는 대승경전에나 있는 줄 알았다. 눈먼 거북이가 대양에 떠 있는 널판지 구멍에 목을 내민다는 이 비유는 매우 유명하다. 법사들이 법문 할 때 흔히 인용하는 문구이다. 사람 몸 받기가 힘든 것임을 말한다. 또한 부처님 법 만나기가 힘든 것에 대하여 맹구우목의 비유를 든다.

 

맛지마니까야에도 맹구우목의 비유가 있다. 니까야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매우 어려움을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어느 정도인가?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 번씩 떠 오르는 널판지 구멍에 목을 내미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맹구우목의 비유에 따르면 축생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M129)라고 했다.

 

육도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축생이다. 개나 소나 돼지나 닭과 같은 축생을 말한다. 축생의 범주에는 태에서 난 것도 해당되고 알에서 난 것도 해당되고 습한 곳에서 난 것도 해당된다. 동물과 새나 곤충 모두 축생의 영역에 해당된다. 그런데 축생에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약육강식이다.

 

축생의 세계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다. 반대로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힌다. 축생의 생태계에서는 먹이 사슬이 있어서 먹고 먹히는 것이 다반사이다. 살생을 하면 살생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약육강식이 일상화 되어 있는 축생의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로 올라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했다.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축생도 인간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 맹구우목의 비유가 실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M129)라고 설명되어 있다. 축생이 인간으로 태어나면 미천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 몸 받기가 힘들다고 한다. 일단 사람으로 태어나면 안심이다. 축생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일생을 보내야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 것이다. 그런데 축생이 인간으로 되었을 때 축생의 습()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오계를 지켜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한 형성 조건을 보면 오계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축생이 어쩌다 인간이 되었을 때 또 다시 축생의 지위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M129)라고 했기 때문이다.

 

축생은 축생의 습관이 있다. 그것은 약육강식이다. 축생이 어쩌다가 인간으로 태어났을지 모르지만 축생 때의 약육강식 습관이 있어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인간으로 머무는 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 최대의 패배가 있는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축복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야 향상이 있을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야 사향사과와 열반을 성취하여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인간의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티벳스님들은 거지로 태어나도 좋으니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인간의 지위를 얻기는 힘들어도 인간의 지위를 잃기는 쉽다. 인간의 지위를 잃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도박의 비유를 들었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가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곳, 지옥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커다란 패배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의 단계가 완전히 성숙하면 이와 같다.”(M129)

 

 

도박을 하면 패가망신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도박을 장려하기도 한다. 경마나 주식은 국가가 인정하는 도박판이다. 큰 것 한방을 노리고 배팅해 보지만 통장의 잔고만 바닥날 뿐이다. 자금이 바닥 나면 돈을 빌려서라도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더 이상 도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박 보다 더 심한 패배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간의 지위에서 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 최대의 패배가 있다. 그것은 악처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악처에 떨어지기는 쉬운데 다시 인간의 지위에 오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었다. 설령 인간의 지위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양육강식으로 대표되는 축생의 습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악처로 떨어지지 쉽다는 것이다.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 가면

 

축생이 인간이 되었을 때 인간으로 머무는 기간은 길지 않다. 축생이 인간의 상태로 태어나도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는데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다시 악처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위로 올라가기는 어렵고 아래로 떨어지기는 쉽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산다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힘들다. 이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을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인간이 되었지만 인간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동물적으로 사는 것과 같다. 인간으로 살지만 축생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대로 사는 것임을 말한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공통적인 두 가지 욕망이 있다. 그것은 식욕과 성욕이다. 인간이나 축생이나 먹어야 산다. 인간이나 축생이나 종족을 보전하려면 성적교섭을 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오로지 두 가지 욕망, 즉 식욕과 성욕으로만 살아 간다면 축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지만 축생으로 사는 것이다. 축생처럼 일생을 살았을 때 축생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에스엔에스에서 개의 출산을 보았다. 개의 새끼를 보면 귀엽다. 그런 한편 어쩌다가 강아지로라며 측은한 느낌이 든다. 또한편으로 윤회의 두려움을 본다.

 

개는 두 가지 본능으로 살아간다. 식욕과 성욕이다. 인간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개는 발정기가 따로 없는 것 같다. 숫컷은 암컷만 보면 올라타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교미가 되었을 때 암컷에 배에서는 생명이 자라게 된다.

 

한번 수정이 되면 걷잡을 수 없다. 생식세포분열은 일반세포분열과 다르게 폭발적이다. 한번 수정이 되면 태아는 폭발적 성장을 하게 된다. 개라면 새끼를 여러 마리 낳는다 열마리를 낳기도 한다.

 

어쩌다 교미한 대가는 크다. 열마리의 새끼가 구물구물 거렸을 때 아비 개는 이를 알기나 할까? 아주 낮은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새끼인줄은 알 것이다. 그러나 무심할 뿐이다. 때로 새끼가 성장했을 때 자식 개와 교미하기도 한다.

 

새끼 개는 새끼 때만 귀엽다. 열마리 새끼가 어미 곁을 떠나 분양 되었을 때 개로서 일생을 살아 간다. 오로지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가는 축생은 그 어미와 아비가 했던 것처럼 똑 같은 일을 저지르고 만다.

 

한번 축생으로 태어나면 계속 축생으로 태어나기 쉽다. 축생이 인간이 되기가 맹구우목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 한번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계속 인간으로 태어날까? 오계를 지킨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오계를 지키기 힘들다. 더구나 식욕과 성욕으로만 산다면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먹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 있는데

 

먹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 있다. 식도락가들을 말한다. 먹는 것을 즐긴다면 죽어서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을 탐하여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 가운데 동료로 태어난다.”(M129)라고 했다.

 

축생의 특징이 있다. 축생은 하루 종일 먹는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하는 것이다. 저장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중에도 먹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 그러나 탐욕으로 먹으면 먹는 것이 대사가 되어 버린다. 식사대사를 말한다. 맛집을 찾아서 몇 시간 운전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맛에 대한 갈애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맛을 탐하는 자들은 죽어서 축생의 동료로 태어난다고 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것은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죽는 꼴을 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축생도 결국 죽게 되는데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키우지 못한다. 다음 이유는 축생처럼 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 사람들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개나 고양이에 정을 붙이면 사람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를 가까이 했을 때 개나 고양이의 삶과 같이 될 것이다. 다음에 태어난다면 어쩌면 개나 고양이의 동료로 태어날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다.

 

개나 고양이와 같은 축생은 새끼 때는 귀엽다. 그러나 다 자랐을 때는 축생일 뿐이다. 오로지 식욕과 성욕이라는 본능에 충실한 축생이라는 것이다. 이런 축생에게서 배울 것은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보다 높은 대상을 지향해야 한다. 그래서 천수념(天隨念)이 나왔을 것이다. 하늘나라 천신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에스엔에스에서 개새끼 동영상을 보았다. 개새끼들이 구물구물거리는 것을 보고서 측은한 마음과 함께 윤회의 두려움을 보았다. 생명이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함부로 교미했을 때 생명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세상에 하찮은 것이 개새끼들이다. 인간이 인간을 욕할 때 개새끼라고 하는데 이는 하찮은 인간을 지칭해서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엇이든지 개자만 붙으며 하찮은 것이 된다. 개의 행실을 빗대어서 개차반이니 개판이니 하는 말이 그렇다.

 

개새끼들을 보면 윤회의 두려움을 느낀다. 성욕이 일어나서 함부로 싸질렀을 때 생명이 탄생되는 것이다. 한번 수정이 되면 돌이킬 수 없다. 태아는 폭발적 성장을 한다. 하찮은 것을 먹어도 귀여운 새끼가 탄생되는 것이다. 그런 개새끼들을 볼 때 마다 어쩌다가 개로 태어나서라는 말이 나온다.

 

 

2022-08-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