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나는 아직도 과거에 사는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23. 07:29

나는 아직도 과거에 사는 사람


고요한 새벽이다. 잠에서 깨어 더 자려 했으나 좋은 생각이 떠올라 엄지로 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수련회 감동에 대한 것이다. 공동체놀이가 크게 다가왔다.

어제 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운명이 아닐까?"라고.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다. 몸이 불편해도 해야 하는 일이다. 이왕 해야하는 일이라면 운명으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그런 한편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의 운명은 어떤 것일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내운명인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있다. 선택할 수 없는 것도 운명이고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운명이다.

가족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일은 거역할 수 있다. 가족으로부터는 도망갈 수 없고 일로부터는 도망갈 수 있다. 그럼에도 집과 일터를 왔다갔다하는 것은 운명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보기 싫어도 봐야 한다면 운명 지어진 것이다. 보기 싫다고 해서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꾸 피하다보면 어떻게 될까? 홀로 고립될 것이다. 과연 나홀로 이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수련회 하일라이트는 상대방 바라보기였다. 23명 중에 사회자와 늦게 온 두 사람, 사진 찍는 사람, 식사준비 하는 사람을 제외한 18명이 참여했다. 2열로 하여 9명의 쌍이 마주 앉았다. 놀이가 진행될 때마다 파트너는 바뀐다. 결국 자신을 제외한 17명과 마주하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상대방 눈동자 바라보기이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말을 할 때 상대방 눈을 바라보고 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치니 피해갈 수 없었다.

사회자는 상대방의 눈동자에서 자신을 보라고 했다. 동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눈만 보았을 때는 쑥스러웠으나 검은 눈동자에서 자신의 실루엣을 보았을 때 자연스러워 졌다. 상대방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자신을 보기 어렵다. 물론 거울로 자신의 얼굴은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면에 있는 나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어떻게 해야 나라는 괴물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은 타인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나의 행위에 대해서 타인의 반응을 봄으로써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타인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산다. 두 명 있으면 두 명이서 주고 받는다. 세 명이면 세 명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를 무수히 확장하면 무수한 관계가 형성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세다. 커다란 물체가 있으면 힘을 느끼는 것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받는 기운이 있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있다. 당연히 쾌불쾌도 있다. 그 사람이 싫다고 하여 멀리 도망갈 수 없다.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이 생에서 만나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도 만날 수 있다.

 


마주보기놀이에서는 주제에 따라 파트너가 바뀐다. 한칸씩 옆으로 이동하면 새로운 파트너와 마주하게 된다. 편한 사람도 있고 불편한 사람도 있다. 거역할 수 없다. 한번 마주하면 함께 해야 한다.

상대방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사회자에게 달려 있다. 상대방 손바닥과 합장하며 온기를 느껴 보라고 한다. 상대방과 직접 접촉이다. 온기를 통해서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편한 사람이라면 부담 없을 것이다. 불편한 사람이라면 감정의 동요가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파트너는 계속 바뀐다.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편한 사람도 있고 불편한 사람도 있다. 사회자가 던지는 지시에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자신이 이제까지 가장 잘 했던 것도 말해야 하고 가장 후회했던 것도 말해야 한다. 상대방은 "그렇네요" "그래서요" "그랬구나"라며 추임새를 넣어 주어야 한다. 잘 경청해주는 것이다.

 


한바퀴를 다 돌았다. 참여자 모두와 파트너가 되어 본 것이다. 불편한 사람이 있다고 하여 피해갈 수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운명지어진 것이다.

살다 보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한다. 싫다고 하여 숨어 버린다면 고립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 고립으로 살 수 없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있다. 이 쌀이 어디서 왔을까? 이 밥을 먹기 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감사의 마음으로 먹지 않을 수 없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혼자 살아도 밥은 먹어야 한다.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한다. 보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한다. 그래서일까 월급의 반은 자신이 일한 대가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반은 욕먹은 대가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아모르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니체가 말한 것이다. 니체는 왜 운명을 사랑하라고 했을까? 신을 죽여 버렸으니 운명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신에 의지하면 된다. 아니 신에게 떠넘겨 버리면 된다. 신을 죽여 버렸으니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그것도 사랑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일이 많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불편한 사람이 있다. 마주할 수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마주하기놀이에서는 파트너가 계속 바뀐다. 18명 참여 했다면 17명과 파트너를 해야 모두 끝난다. 파트너 선택 자유는 없다. 불편한 사람도 한번은 마주하게 되어 있다. 불편하다고 해서 가만 있을 수 없다. 사회자는 무언가 하게 만든다. 그것은 손바닥 마주하기나 등안마와 같은 신체 접촉도 있다. 또한 가장 잘한 일이나 아쉬웠던 일 등 속마음을 털어 놓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흔히 인간을 연기적 존재라고 말한다. 내가 있음으로 상대방이 존재함을 말한다. 내가 있는 한 타인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싫다고 하여 멀리 할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 내 마음 속에 그 사람이 있는 한 나는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몇주전 영화를 보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은 어머니는 주저 앉았다.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삶이 바뀌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놀라운 말을 했다. 아들은 죽었어도 자신의 가슴 속에는 살아 있다고 했다. 그것도 스무살 앳된 모습이라고 했다.

멀리 떨어진 사람이 있다. 멀리 있어도 마음 속에 있다면 면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불편한 사람도 마음 한켠에 있다면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자신도 잘 모르는데 상대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싫어하고 멀리한다. 마음 속에 있는 그 사람이 정말 그 사람 맞을까?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A10.75)

부처님은 평가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타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뒷담화 한다면 이는 자만에 따른 평가자라고 볼 수 있다.

자만은 내가 있다는 견해에서 나온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느낌이나 감정도 해당된다. 타인에 대한 호불호와 쾌불쾌 역시 자아관념에서 나온다. 상대방에 대해서 좋고 싫음에 대해서 말했을 때 평가자가 된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나온 구가 있다. 그것은 "I am not what I was"라는 말이다. 해석하면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지금도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옛날의 나는 아니다. 나는 매일 바뀌고 있다. 한시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시시각각 나는 바뀌고 있다. 하물며 오래 전의 일이랴.

나는 과거의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과거의 이미지 때문에 그런 사람으로 간주한다.

 


지금 마주 하고 있는 사람은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과거 이미지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자만이다. "내가 누군데"라며 평가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아난다여, 그것에 대하여 평가하는 자가 이와 같이이 사람에게 그 성품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그 성품이 있다. 어째서 그들 가운데 하나는 열등하고 하나는 탁월한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오랜 세월 불익과고통이 된다.” (A6.44, A10.75)

평가자는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 호불호와 쾌불쾌로 평가하려 한다. 이것이 자만이다. 우월적 자만, 동등적 자만, 열등적 자만이 있다.

자만이 있을 때 평가자가 된다. 속된 말로 뒷담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놀랍게도 열등도 자만이라고 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동등감도 자만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 자만중에 우월적 자만이 있다. 크게 태생적 자만, 배운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이 있다.

태생적 자만은 부처님 당시 바라문 계급에 해당된다. 오늘날에는 성직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해당된다. 출가자도 태생적 자만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들끼리 어울린다.

배운자의 자만은 공부를 많이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이른바 가방끈이 긴 사람들이다. 최종 학위가 높다면 자연스럽게 배운자의 자만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래서 그들끼리 어울린다.

많이 가진자는 부자의 자만이 되기 쉽다. 가난한 자는 상대하기 힘들다. 동창회에서 경제적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 소원해지는데 이는 우월적 자만과 열등적 자만 모두 해당된다. 그래서 부자는 부자끼리 모여 산다.

 


공동체놀이는 마음의 빗장을 열게 했다. 나이나 지위,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가 된 것이다. 더구나 일대일 마주보기 했을 때 탈탈 털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과거에 사는 사람이다.


2022-08-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