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수련회에서 최상의 공양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23. 21:22

수련회에서 최상의 공양을


한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정성이 깃든 이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바로하고
청정하게 살겠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공양게이다. 정평불 수련회 할 때 처음 들어 봤다. 2018년 여름 수련회 때 들어 본 것이다.

재가불교활동한지 오래 되지 않았다. 2015년에 시작했으니 새내기라고 볼 수 있다. 대불련 활동도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직장생활만 20년 했다. 이후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글을 썼다. 시절 인연이 되었는지 재가불교단체에서 재가불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재가활동가 초짜로서 모임에 가능하면 빠짐없이 참석한다. 참석해서 기록을 남긴다. 이번 정평불과 신대승의 연합수련회도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번 글은 음식에 대한 것이다.

흔히 식사대사라고 한다. 먹는 것처럼 큰일 없다.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욕구에는 식욕과 성욕이 있는데 성욕은 참을 수 있어도 식욕은 참을 수 없다.

정평불-신대승 연합수련회가 열렸다. 8 20()부터 21()까지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활인선원에서 이틀간 일박이일 진행되었다. 밥을 세 번 먹었다. 두 끼는 선원에 먹었고 한끼는 밖에서 먹었다.

 


선원에는 공양주보살이 없다.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도시락을 먹거나 배달해서 먹어야 한다. 그러나 정평불에는 사찰음식 전문가가 있다. 유병화 선생이다.

유병화 선생이 두 끼를 먹게 해 주었다. 20일 저녁밥과 21일 아침밥이다. 음식을 챙겨 주는 사람이 있어서 안심하고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아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공양게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님들의 오관게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재가단체에서 통용되는 공양게를 말한다.

밥먹는 것도 수행이다. 밥먹는 것이 왜 수행인가?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인가? 초기경전에 따르면 번뇌를 부수기 위한 세 가지 원리가 있다. 이는 1)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 2)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 3)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원리를 지키면번뇌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기반을 얻는다.”(A3.16)라고 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 , 치의 소멸로 가능하다. 그런데 음식절제는 탐욕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다.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면 탐욕도 절제되지 못하기 때문에 음식의 적당량을 알라고 했다. 오후불식하는 것도 탐욕과 관련 있을 것이다.

오후에 먹지 않으면 확실히 탐심이 줄어드는 것 같다. 이는 선원에서 집중수행할 때 확인 된다. 시도때도 없이 먹어댄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탐심으로 먹기 때문에 탐욕만 증장될 것이다.

 


수행이라 하여 좌선과 행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수행아닌 것이 없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아무생각없이 먹으면 탐욕으로 먹기 쉽고 분노로 먹기 쉽다.

수행자는 어떻게 먹어야 할까?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세 가지로 먹으라고 한다. 사마타로 먹고 위빠사나로 먹고 계율로 먹는 것을 말한다.

사마타로 먹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앞서 언급된 공양게송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음식이 여기까지 오기에 관련된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는 것이다. 농부, 판매자, 운전자, 봉사자가 해당된다. 선원이라면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선원장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자애의 마음으로 먹는 것이다.

위빠사나로 먹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알아차림하면서 먹는 것을 말한다. 밥을 한숫가락 들 때 알아차려야 하고, 입에 넣을 때 알아차려야 하고, 씹을 때 알아차려야 하고, 목구멍으로 넘길 때 알아차려야 한다. 식사 전과정에 대하여 알아차림하며 먹을 때 위빠사나로 먹는다고 말한다.

계율로 먹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확인된다.

"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안다.” (S35.239)

이것이 계율로 먹는 것이다. 음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기름칠할 정도로 먹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 공양게라 할만하다.

음식을 약으로 먹을 수 있다. 환자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평소에 음식을 약으로 알아 먹는다면 계율로 먹는 것이 아니게 된다. 빠알리 공양게 그 어디에도 음식을 약으로 알아 먹으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이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음식에 대한 혐오적 지각의 수행(
āhāre paikkūla bhāvanā)은 마흔 가지 사마타명상주제에 해당된다.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는 다음과 같은 음식혐오수행 공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음식에 대한 혐오의 지각에 전념하는 수행승은 맛에 대한 갈애로부터 마음이 움츠려들고 꼬부라들고 수렴된다. 그는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자가 아들의 고기를 먹는 것처럼, 허영을 여의고 괴로움을 건너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다. 이렇게 되면, 그는 물질의 자양을 완전히 알게 되는 까닭에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도 완전하게 알게 된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도 완전하게 알게 되는 까닭에 물질적 다발도 완전히 알게 된다. 소화되지 않은 것 등의 혐오의 상태를 통해서 신체에 대한 새김의 수행도 원만해 진다. 부정에 대한 지각을 통해서 순조롭게 행도가 닦여진다. 이러한 행도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의 불사(不死)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내세에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Vism.11.26)

이것이 음식혐오수행 공덕이다. 음식에서 고기 보기를 아들고기 보듯 하라고 했다. 사막을 횡단하던 부부가 먹을 것이 떨어져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죽은 아기의 고기를 먹은 것을 말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똥이 되서 나온다. 먹은 음식을 토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개밥그릇에 있는 개의 토사물과 같을 것이다. 토한 음식은 다시 삼킬 수 없다.

음식혐오수행은 음식대하기를 아들고기처럼 보고 개밥통에 있는 개밥처럼 보아야 한다. 음식혐오수행은 못하더라도 사마타로 먹고 위빠사나로 먹고 계율로 먹어야 한다.

수행자에게 식사는 대사이다. 할 일 없는 자에게도 식사는 대사이다. 전자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고 후자는 먹기위해서 산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천지차이가 난다.

맛을 탐하면 축생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일찍이 여기서 맛을 탐하고 여기서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가운데 동료로서 태어난다."(M129)라고 했다.

 


수련회에서 최상의 공양을 했다. 왜 최상의 공양인가? 산해진미를 먹은 것이 아니다. 제철에 나는 것을 먹었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밥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찰음식 전문가 유병화 선생의 공덕이다. 수련회가 열릴 때마다 공양봉사를 해 주었다. 유병화 선생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2022-08-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