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주지스님
활인선원 일박이일 수련회를 마쳤다. 정평불과 신대승이 함께 한 이번 수련회는 일생에서 길이 남을만하다. 재미있었다. 물론 즐기기 위한 수련회는 아니다. 한국불교의 방향에 대하여 토론해보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기에 위해서는 먼저 한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격이 다른 두 재가단체가 결합되기는 쉽지 않다. 각 단체마다 추구하는 이념과 단체 고유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힘을 합하면 힘이 배가 된다. 그런데 정평불과 신대승은 이미 몇 차례 함께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정평법회를 함께 했었고, 눈부처학교를 함께 했었고 이번에 수련회도 함께 하기에 이르렀다.
두 단체 구성원들은 서로 모른다. 일부 사람들은 안면이 있을 수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놀이로 가능하다. 함께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는 것이다.
술래잡기놀이가 있었다. 문답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빈 자리에 앉기 게임이다. 놀이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빗장은 풀어진다. 한바탕 웃고 나면 마음의 무장은 해제된 것이나 다음 없다.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 놀이도 있다. 22명이 참여했다면 자신을 빼고 21명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눈동자 바라보기도 있고 안마해주기도 있다. 한바퀴를 돌면 남성과 여성 할 것 없이 파트너가 바뀐다. 평소 소원했었던 사람들도 이 놀이를 통하여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공동체놀이로 마음의 문이 모두 열렸다. 모두 친구가 된 것이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니 모두 친구가 된 것이다. 수련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이를 지도한 방기연 선생의 역할이 컸다.
모임이란 무엇일까? 싸우기 위해서 모이는 모임은 없을 것이다. 모임은 화합의 모임이어야 한다. 더 좋은 것은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정진의 모임에는 수련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모두 함께 했다. 공동체놀이, 한국불교방향 토론회, 새벽예불, 새벽 참선, 아침요가, 울력, 산행을 함께 했다. 일박이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 주지스님이 있어서 가능했다.
스님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대개 차가운 느낌이다. 정을 잘 주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수행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들에게 자비심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비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없다. 자비는 없이 지혜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차가운 느낌일 것이다. 마치 감정이 없는 에이아이(A.I) 같다. 수행자가 날카로운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다면 에이아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활인선원 주지스님은 친절하다. 사십대로 전라도 억양의 스님이다. 미황사에서 오래 있었다고 한다. 금강스님 제자라고 볼 수 있다. 훌륭한 스님 밑에 훌륭한 제자가 있는 것 같다.
활인선원 주지 혜오스님은 자상하다. 찾아 온 사람들을 마치 손님 대하듯 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넒은 선원을 혼자 관리한다는 것이다. 농사도 홀로 짓는다. 그 정도 규모의 선원이면 스님이 5명 정도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공양주 보살도 없고 일하는 처사도 없다. 마치 북치고 장구치듯이 혼자 다한다.
스님은 넓은 도량을 혼자 관리한다. 수련회 사람들을 지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인다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자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비의 마음이 없다면 나홀로 지내며 편하게 살 것이다.
오늘 새벽참선이 끝나고 요가를 했다. 스님은 30분 동안 갖가지 동작의 요가를 가르쳤다. 한번도 쓰지 않은 근육을 쓰게 되자 여기저기서 “아구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시원했다. 스님이 하라는대로 했더니 되는 것이었다. “요가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이것도 자비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스님과 차담시간이 있었다. 오전에 산행이 끝난 다음에 다실에 모두 모였다.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차담이었다. 차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듣다 보니 이제까지 차에 대하여 파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우롱차로 시작했다. 차맛은 밋밋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차츰 강도를 높여 갔기 때문이다.
스님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도에 대한 얘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다시 들으니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차를 마실 때 어떻게 마셔야 할까? 아무 생각없이 마실 수 없다. 찻잔을 소주마시듯이 마셔서는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번에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차를 마실 때 찻잔의 바닥이 상대방에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손으로 마신다. 왼손으로 바닥을 가리며 마시는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차 마시는 것에 대하여 ‘물고문’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따라주는 차를 계속 마시다 보면 화장실에 자주 왔다갔다 하는데 이를 ‘물고문 당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를 마시기 싫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찻잔을 들고 있으라고 한다. 찻잔을 들고 있으면 차를 따라주지 못할 것이다.
갖가지 종류의 찻잔이 있다. 어느 것이 가장 좋을까? 스님에 따르면 백자가 최상이라고 한다. 같은 조건이라도 백자에 담겨진 차맛이 더 좋음을 말한다. 마치 같은 밥이라도 플라스틱그릇보다는 사기그릇에 담아 먹는 것이 더 맛있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스님은 차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이야기 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마치 영업비밀을 모두 털어 놓는 것 같다. 스님은 꿀팁을 하나 더 알려 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차 마시는 시간에 대한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손님이 왔을 때 커피를 마시면 30분이면 족하지만 차를 마시면 3시간을 마실 수 있다는 말이다. 커피는 다 마시면 일어나야 하는 개념이다. 물론 리필도 있지만 마시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30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차는 주거니 받거니 하기 때문에 차가 매개가 되어 끊임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커피보다는 차를 내 놓는 것 같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차를 마시고 싶다면 4시간 마실 요량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 4시간인가? 그것은 4시간이 되야 맛있는 차를 맛볼 수 있음을 말한다. 최상의 맛을 가진 차는 마지막에 나온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다 보면 똑 같은 차를 계속 마실 수 없다. 바꾸어야 주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좋은 차를 내놓지 않는다고 한다. 차츰차츰 단계를 높여 가다가 4시간 되었을 때 가장 아끼는 차를 내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차맛을 보려거든 4시간 마실 요량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최상의 차를 맛볼 수 있는 꿀팁이라고 했다.
차를 마실 때 예절이 있다. 기본 예절은 지켜야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공감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차 맛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맛있습니다.”라며 칭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더 맛있는 차, 더 귀한 차를 얻어 마실 수 있다고 말한다.
차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차가 선보였다. 우롱차로부터 시작해서 녹차, 발효차를 마시고 마지막으로 홍차를 마셨다. 맛이 각각 다 달랐다. 어떤 차는 속이 시원했다. 마치 몸속에 있는 오염물질이 내려가는 듯 개운했다.
좋은 차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섯 가지 맛을 말했다. 이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떫은맛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맛이 조화롭게 엮여야 좋은 차라고 했다. 그런데 차를 다 마시고 났을 때 단맛이 나는 차가 좋다고 했다. 단맛이 나면 침이 고이는데 좋은 차는 계속 우려도 단맛이 난다고 한다.
흔히 차담한다고 말한다. 이는 차를 마실 때 상대가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초의선사의 다신전(茶神傳)에 따르면 혼자 마실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이는 상식을 깨는 것 같다. 차담이라 하여 차는 상대가 있어서 마셔야 가장 차마시기 좋은 상태로 알고 있으나 혼자 마시는 차가 가장 마시기 좋은 상태라는 것이다.
차를 혼자 마신다. 차를 혼자 마실 때 차를 음미하며 마신다. 차를 마시면 마음이 차분해지기 때문에 여유를 마신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나홀로 마시는 차가 최상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벗이 왔을 때 둘이서 마시는 차가 좋다고 한다. 세 명이면 어떨까? 주지스님은 다신전을 인용하여 “셋이서 마시면 다신이 흩어집니다.”라고 말했다.
주지스님과 차담하면서 차에 대하여 상식적인 지식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차담에 대한 것이다. 차는 혼자 마시는 것이 최상이지만 차담하게 되면 두 명이 좋다고 한다. 세 명이서 차를 마시면 다신이 흩어진다고 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 분위기와 관련 있는 것 같다. 세 명이서 마실 때 주의력이 분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박이일 수련회를 마쳤다. 함께 모여 놀이를 하고 토론하고 좌선하고 산행하고 차를 마시는 인연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백번천번 온라인에서 보는 것 보다는 한번 만나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일박이일 수련회는 어떠할까?
불자들은 사찰순례다닌다. 단체로 사찰순례하면 삼사 또는 이사 순례한다. 대개 당일코스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당일코스 백번하는 것 보다 일박이일 한번 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백번 이상 사찰순례를 단체로 다녔지만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박이일 한 것은 기억에 또렸하다.
남자들은 대방에서 함께 잤다. 너른 방에서 열 명 이상 잔 것이다. 어떤 이는 환경이 바뀌면 잠을 잘 자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일박이일 수련회나 성지순례를 기피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방을 쓴 인연을 매우 깊다. 다음에 만나면 반갑게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평불과 신대승이 함께 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가 된 것 같다. 여러 재가불교단체도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의 마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수련회가 성공적으로 된 것은 주지스님의 협조가 크다. 주지스님이 헌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자비로운 스님 같다.
2022-08-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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