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맛지마니까야 완독 대장정을 마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8. 12:01

맛지마니까야 완독 대장정을 마치고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이 말은 숫따니빠따 라훌라의 경’(Sn.2.11)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은 사랑하는 외아들 라훌라에게 왜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을까?

 

세상을 싫어하면 염세주의자가 된다. 부처님은 세상을 싫어하여 따나라고 했다. 부처님은 염세주의자일까?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했을 때 부처님을 염세주의자로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은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이렇게만 말했다면 부처님은 염세주의자로 몰려서 담마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못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만 설한 것이 아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해법까지 제시해 주었다. 그래서 진리는 고, , , 도라는 네 가지 진리가 된다. 사성제로 설했기 때문에 담마의 수레바퀴가 오늘날까지 굴러 온 것이다.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라훌라는 일곱 살 때 출가했기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왜 세상을 떠나라고 했을까?

 

니까야는 본문만 읽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주석을 보아야 한다. 각주를 보면 관련문구에 대하여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실망해서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지각을 가져라.”(Prj.II.343)라고 되어 있다.

 

관련 구절에 대한 원문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nibbidābahulo bhava”(Stn.340)라는 문구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라고 번역했다.

 

빠알리어 ‘nibbidā‘aversion; disgust; weariness’의 뜻이다. 한자로는 , 厭離, 의 뜻이다. 보통 염오()라고 말한다. KPTS 에서는 싫어함으로 번역했다. 그것도 많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nibbidābahulo’라고 했다. 무엇을 싫어하는가? 이는 ‘bhava’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빠알리어 ‘bhava’‘the state of existence’의 뜻이다. 일반적으로 존재라고 말한다. 존재를 아주 싫어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떤 존재로도 다시 태어나는 것을 싫어함을 말한다. 다시는 윤회하지 않음을 말한다.

 

매일매일 똑 같은 일상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나날이다. 내일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있다. 미세한 변화가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는 것이다.

 

똑 같은 영화를 열번, 백번 보라고 하면

 

똑 같은 영화를 열번, 백번 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아름다운 영화라도 두 번, 세 번 보면 식상한다. 하물며 열번, 백번 보라고 한다면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천번, 만번 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것이다.

 

요즘 밖에서 사람들을 유심히 보곤 한다. 젊은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산책 나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때 이런 시절이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삶도 반복되는 것 같다. 다시 태어나면 똑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존재로든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전의 삶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을 것이다. 본능대로 살아 갈 것이다. 살다 보면 결국 이전에 했던 것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마치 똑 같은 영화를 백번, 천번 보는 것과 같다.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부처님은 윤회를 끝내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미련이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nibbidābahulo bhava”라 하여, 존재를 싫어하라고 했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삼계의 존재를 말한다.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이는 삼계의 존재를 싫어하여 떠나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라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다.

 

요즘 자연인 프로가 인기 있다. 세상을 떠나서 산속에서 홀로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이다. 부처님이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을 때 정말 세상을 떠난다면 자연인과 같이 될 것이다.

 

세상이 싫어서 산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있으면 괴로운데 산중에 홀로 사니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데서 산다고 하며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번뇌로 가득한 삶을 산다면 산속에 있으나 세상 속에 있으나 똑 같은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신 세상은

 

부처님은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한 세상은 중생계나 공간계가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의 관심사가 있다. 그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세상은 무한한가 유한한가?’등의 세속적인 철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부처님은 이 작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다.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에 대하여 설명했다. 세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에 관하여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으로 보았다. 그래서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이 세상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세상에서 아주 싫어하여 떠날 것을 말했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을 때 그 세상은 삼라만상과 산천초목이 있는 기세간이 아니다. 여섯 가지 감역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세상을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를 참고할 수 있다.

 

라훌라경은 숫따니빠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맛지마니까야에는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M147)이 있다. 그런데 이 경은 여섯 감역의 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을 때 세상은 기세간이 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임을 말하는데 이는 경전적 근거가 된다.

 

여섯 감역과 오온이 함께 설해진 법문에서

 

부처님은 라훌라가 구족계를 받았을 때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알려 주었다. 부처님은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고 문답식으로 알려 주었다. 시각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시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에서 어떠한 느낌, 어떠한 지각, 어떠한 형성, 어떠한 의식이 생겨나든지, 그것들에서 싫어하여 떠난다.”(M147)

 

 

니까야에서 이런 법문은 드물다. 왜 그런가? 이는 여섯 감역과 오온이 함께 설해진 법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섯 감역은 물질적 다발에 대한 것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적 다발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정신-물질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고 설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다 보니 번뇌가 일어난다. 왜 번뇌가 일어날까? 그것은 집착하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번뇌가 일어나는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집착하지 않을까? 그것은 싫어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싫어하여 떠나라라고 했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세상을 말한다. 여섯 가지 감역과 오온에서 생멸하는 것이 세상이다. 부처님은 이런 세상에서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맛지마니까야 마지막 품에서는 여섯 가지 감역에서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이렇게 싫어해서 떠났을 때 다음과 같이 선언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에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난다.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M148)

 

 

이 세상에서 떠나려면 이 세상을 싫어해야 한다. 그런 세상은 삼라만상 산촌초목의 기세간이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파괴해야만 세상을 벗어 날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말이다.

 

머리맡 맛지마니까야를 완독하고

 

맛지마니까야를 모두 다 읽었다. 지난 3월 맛지마니까야를 읽기 시작한 이래 6개월만에 다 읽었다. 대장정을 했다. 걸어서 대륙을 횡단한 듯한 느낌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에는 디가니까야 완독에 도전한다.

 

맛지마니까야를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욕심내지 않고 하루에 한경 읽었다.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음에 볼 때 참고가 되도록 형광메모리 칠을 해 두었다. 감명 깊은 구절은 글을 써서 새겼다. 이렇게 하루 이틀 꾸준히 읽다 보니 다 읽게 되었다.

 

 

그동안 경솔 했었다. 니까야는 방대하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만 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십년 이상 그렇게 보았다. 그 결과 노랑 형광메모리칠 된 부위가 많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번 다 본 것 같았다.

 

경전은 필요한 부분만 봐서는 안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야 한다. 당연히 각주까지 다 읽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슴을 올리는 문구는 기억하고 새겨 놓아야 한다. 이것이 경전읽기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맛지마니까야를 완독했다. 수많은 가르침에서 가장 가슴을 울리는 말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다. 이를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진다.(Nibbinda virajjati)”라고 했다.

 

세상을 어떻게 해야 싫어할까?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은 염오(nibbinda)와 이욕(virāga)을 설명할 때 전봇대 비유를 들었다. 전봇대에 토해진 음식을 보듯 싫어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테라가타에서는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라고 했다. 전봇대의 비유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토한 음식을 다시 집어 먹을 수 없다. 세상 보기를 토한 음식처럼 보아야 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토한 음식처럼 본다면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사라지게 하지 않을까?

 

 

2022-09-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