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내가 경전읽기 하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9. 11:13

내가 경전읽기 하는 것은

 

 

요즘 유튜브에서 싸띠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싸띠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에 싸띠스님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법문을 들어보면 싸띠로 시작해서 싸띠로 끝난다. 싸띠 하나만 가지고 한시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랍다. 마치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이것 하나만 가지고 한시간 말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싸띠스님이 말하는 싸띠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마음에 대한 것이다. 본 것을 아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두 번 아는 것이 된다. 보고 알고, 보고 알고, 이렇게 끊임없이 보고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보는 수행, 심념처라고 한다.

 

보는 마음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나중의 마음이 이전의 마음을 알았을 때 싸띠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상을 보았을 때 보는 마음이 있는데, 이 보는 마음을 또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훈련이 되었을 때 탐욕과 성냄은 발 붙이지 못할 것이다. 보는 즉시 아는 마음이 생겨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보는 마음 아는 마음이 있으면 보는 족족 사라진다. 번뇌가 있을 수 없다. 알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르면 어떻게 될까? 대상에 끄달려 가게 될 것이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싫으면 물리칠 것이다. 이는 탐욕과 성냄에 대한 것이다. 놀랍게도 경전적 근거가 있다.

 

 

그 즐거운 느낌에 닿아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탐착하면, 탐욕에 대한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닿아 슬퍼하고 상심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으면서 곤혼스러하면, 분노의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M148)

 

 

맛지마니까야 148번 경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탐욕과 성냄에 대해서 느낌으로 설명했다. 즐거운 느낌이면 거머 쥐려 하기 때문에 탐욕이 되고, 괴로운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분노가 된다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는 마치 시소를 타는 것과 같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 강하면 탐욕이 발생되고, 괴로운 느낌이 강하면 분노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의 느낌이 있다. 이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립적인 느낌이 있게 되면 평온하다는 것이다. 탐욕도 성냄도 아닌 중립적인 느낌이 되었을 때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조건이 바뀌면 또다시 탐욕의 마음과 분노의 마음으로 바뀐다. 부처님은 이런 중립적인 마음에 대하여 무명이라고 했다.

 

중립적인 마음이 왜 무명인가? 이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 그 느낌의 생성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무명의 경향이 잠재하게 된다.”(M148)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발생과 소멸이다.

 

흔히 탐, , 치라고 한다. 이를 로바(lobha), 라가(raga), 모하(moha)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불선법은 모든 불선법의 뿌리에 해당된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불선법은 탐욕과 사견과 자만이 있다. 성냄을 뿌리로 하는 불선법에는 성냄, 질투, 인색, 후회가 있다. 어리석음과 관련된 것으로는 무명이 있다.

 

, , 치 세 가지 불선법의 뿌리 중에서 가장 보기 어려운 것은 모하()이다. 왜 모하를 보기 어려운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는 잘 드러난다. 그 다음으로 잘 드러나는 것은 탐욕이다. 왜 그런가? 분노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탐욕의 발생과 소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모른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잘난 맛에 살기도 한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것에 대하여 자만에 가득 찬 삶을 산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라고 했다. 이런 것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탐욕과 분노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즐거운 느낌은 탐욕을 유발하고, 괴로운 느낌은 분노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리석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즐거운 느낌도 아니고 즐거운 느낌도 아닌 무덤덤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중립적인 느낌이다.

 

중립적인 느낌은 평온한 느낌이다. 그러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평온이다. 조건이 바뀌면 탐욕과 분노가 생겨난다. 중립적은 느낌은 알기 힘들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느낌의 생성과 소멸을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붓다아비담마에서는 모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미혹이 우리의 정신적인 눈을 가리고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물질이 매우 빠르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과 그 결과로 생기는 위에서 언급한 4가지 특성을 볼 수 없다.”(붓다아비담마 114)

 

 

붓다아비담마는 미얀마 멤 틴 몬이 지은 것이다. 불광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김종수 선생이 번역했다. 미혹은 모하를 말한다. 모하를 뿌리로 하는 것에는 4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미혹(moha: 무명 avijja), 도덕적 부끄러움(ahirika), 도덕적 두려움 없음(anottappa), 들뜸(uddhacca)을 말한다.

 

아비담마에서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생성과 소멸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은 맛지마니까야 148번 경에 있는 어리석음에 대한 해설과 일치한다. 정신-물질의 생성과 소멸을 보지 못했을 때, 즉 연기를 보지 못했을 때 무명이라고 했다.

 

, , 치 삼독 중에서 가장 보기 어려운 것은 어리석음이다. 이에 대하여 붓다아비담마에서는 영화감독의 비유를 들었다. 이는 예를 들면 미혹은 영화감독과 같다. 그는 모든 것을 감독하지만, 우리는 영화감독을 영화 스크린에서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미혹을 볼 수 없다.”(붓다아비담마 114)라고 설명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어리석음은 무명과 동의어이다. 느낌의 생성과 소멸, 유혹과 위험을 보지 못했을 때 탐욕의 삶과 분노의 삶을 살게 된다. 일상에서 느낌에 따라 매순간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무명의 경향을 근절하지 않고, 무명을 버리지 않고 명지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현세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성취하겠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M148)라고 했다.

 

나에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느낌이 너무 강하면 제어되지 않는다. 탐욕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알 수 있다. 역시 느낌이 강하면 휩쓸리고 만다. 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이다. 시각, 청각 등 여섯 감역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싸띠스님은 늘 싸띠하라고 말한다. 마치 이것을 말하는 자가 이것 하나만 가지고 한시간 말하듯이, 싸띠 스님은 때로 호탕하게 웃으면서 싸띠 하나로 한시간 말을 한다. 그런 싸띠는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두 번 보는 것이다. 본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보는 마음 아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싸띠스님은 싸띠에 대하여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싸띠도 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싸띠라는 말은 본래 이전 것을 기억한다는 의미가 크다. 아는 마음 역시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싸띠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수행적 의미에서 싸띠이고, 또 하나는 가르침의 의미에서 싸띠이다. 전자는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법관찰이라는 사념처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후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는 것이라고 본다. 불수념이나 법수념과 같은 아눗싸띠(隨念)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맛지마니까야를 읽었다. 육개월에 걸쳐서 읽은 것이다. 읽은 것에 대해서 회향했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수희찬탄했다. 공덕을 회향 했기 때문에 공덕은 수희찬탄하는 사람의 것이 된다. 그러나 공덕은 물질과 달라서 아무리 나누어 가져도 줄어들지 않는다.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회향공덕이다. 그래서 보시 등 공덕을 지으면 반드시 회향하라는 것이다. 나누어 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맛지마니까야 완독을 회향하는 것은 공덕을 나누어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견해가 다른 것 같다. 경전을 읽는다고 하여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그걸 누가 모릅니까?라고 말해 주고 싶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두꺼운 경전을 몇 년에 걸쳐서 읽어도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경전읽기를 하면 번뇌가 사라지는 것 같다. 물론 일시적으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다.

 

마음이 격정에 휩싸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경우 경전읽기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무 경전이나 펼쳐서 읽으면 몇 구절 읽지 않아서 다른 마음이 된다. 경전을 읽는 순간 격정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경전에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경전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지혜가 생겨나는 것 같다. 수천년동안 전승되어 온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니까야가 그렇다. 이와 같은 니까야를 모두 다 읽어 보고자 한다.

 

 

2022-09-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