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심청정이면 왜 중생청정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13. 11:28

심청정이면 왜 중생청정인가?

 

 

오늘 아침 절구커피를 만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청정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도 청정한 것 아니냐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그제 새벽 글을 쓴 것에서 한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라는 말이다.

 

 

유마경에 심청정국토청정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를 니까야로 본다. 바로 상윳띠나까야 가죽끈에 묶임의 경에 있는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아침에 머리를 감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아침에 커피를 만들다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 올랐을 때 좋은 글쓰기 소재가 된다. 잘 기억해 두었다가 글쓰기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문득 갑자기 내마음이 청정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청정하다.’라는 문구가 머리를 스쳤다. 왜 이 말에 필이 꼽혔을까? 그것은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관련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이와 같이오랜 세월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

 

 

오염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도 오염되어 보일 것이다. 매혹적인 여인을 보았을 때 욕정이 생겨날 수 있다. 마음이 온통 여인의 매력적인 모습에 쏠렸을 때 여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이 때 여인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오물장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이 탐욕으로 불탈 때 세상도 탐욕으로 불탈 것이다. 마음을 흔들어 놓은 여인에게 잘못이 있을까? 옷차림 등 야한 모습의 여인에게는 잘못이 없다. 여인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세상에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 있지만,
여기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S1.34)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 옷차림이 야한 여인을 보고서 욕정이 생겼다면 나의 마음이 욕망에 정복된 것이다. 오염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로 보았을 때 세상은 온통 욕망의 세상이 된다. 아마 모든 여인들이 성적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옷차림이 야한 여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꽃단장을 한 여인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인에게 잘못을 묻는다. 여인이 유혹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문제이다. 경에서는 의도된 탐욕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들

 

세상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푸념하는 사람들이다. 에스엔에스에서도 볼 수 있다. 자칭타칭 평론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정치에 대하여 평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평론으로 시작해서 평론으로 끝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불만을 써 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평론가들은 글로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같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글로서 표현하면 어느 정도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래서 어떻게 하라구요?”라는 말이 나올 것 같다. 행동으로 나서지 않고 글로서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번 분노에 휩싸이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현정부에 대한 불만뿐만 아니라 민주당에 대한 불만도 표출한다. 수박이라 하여 백안시 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에스엔에스를 보면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반골기질이 있고 진보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 쳐내고 저것 쳐내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탈레반의 길로 가자는 것일까?

 

누구나 분노의 감정은 있다. 사람에 대한 분노도 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분노의 감정을 표출했을 때 그 사람은 분노의 마음으로 오염된 것이다. 분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을 때 세상은 분노로 가득찬 세상이 된다.

 

평론가가 되면 다친다

 

부처님은 평론가가 되지 말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A10.75)

 

 

사람들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사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다보면 험담이 되기 쉽다. 나중에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 다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평가자가 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A10.75)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될 수 있으면 장점을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단점을 이야기하려거든 둘이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 여럿 있을 때는 그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이 정치에 대하여 평론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평가하는 사람이나 평론하는 사람이 완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가나 평론은 누가 해야 하는가? , , 치가 소멸된 사람이 평가하고 평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부처님 같은 사람이나 아라한 같은 사람이다. 일반사람이 평가나 평론했을 때 분노로 인하여 상대방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자아성찰이 없는 평론은

 

자칭타칭 평론가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탐, , 치가 있는 상태에서 평론했을 때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한가지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있다. 평론가들이 성찰했을 때이다.

 

본래 평가나 평론은 번뇌가 소멸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평가나 평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면 자아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아성찰이 있는 평가자나 평론자의 말은 들어 줄만하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왕겨처럼 키로 켜지만

자신의 잘못은 덮어 버린다.

교활한 도박꾼이

잘못 던진 주사위를 감추듯.”(Dhp.253)

 

 

남의 잘못은 보기 쉽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고 했다. , , 치로 물든 자가 평가자가 되었을 때 신뢰할 수 없다.

 

자신의 허물은 말하지 않으면서 남의 허물만 말하는 자가 있다. 이에 대하여 교활한 도박꾼과 같다고 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보고서 항상 혐책의 상념을 지니면, 그의 번뇌는 증가하리니”(Dhp.253)라고 했다.

 

월호스님이 호탕하게 웃는 까닭은

 

오늘 아침 커피를 만들다가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청정하면 세상도 청정하다는 것이다. 이는 유마경에 나오는 심청정국토청정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유마경보다 더 오래된 니까야에서 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라는 말을 발견한 것이다.

 

경전을 읽다보면 새겨 두어야 할 문구가 있다. 심청정중생청정에 대한 가르침도 그렇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니 “Cittasakilesā, bhikkhave, sattā sakilissanti; cittavodānā sattā visujjhanti.”(S22.100)라고 되어 있다. 마음이 오염되면 중생도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해진다는 말이다.

 

니까야에서 마음청정중생청정에 대한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크게 다가 온다.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커다란 발견이라도 한 것 같다. 마치 커다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 같다.

 

월호스님이 있다. 법문중에 호탕하게 잘 웃는 스님이다. 스님은 유튜브 법문에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시절 삼각산 바위 위에서 갑자기 커다란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깨닫고 보니 자신의 마음이나 세상의 마음이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깨달은 자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과 같은데 깨닫고 보니 부처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한바탕 호탕하게 호기롭게 크게 웃었다고 한다.

 

열 가지 낄레사(汚染)

 

오늘 커피를 만들다가 문득 한문구가 떠올라 글을 쓰게 되었다. 유마경 심청정국토청정의 모티브가 되는 심청정중생청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마음이 오염되었을 때에 (Cittasakilesā) 중생도 함께 오염된다(sattā sakilissanti)’라는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이 가르침이 확 다가 온다.

 

오염은 낄레사를 번역한 말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열가지 낄레사가 있다. 빠일리 사전 PCED194에 따르면 “(1) greed (lobha), (2) hate (dosa), (3) delusion (moha), (4) conceit (māna), (5) speculative views (diṭṭhi), (6) skeptical doubt (vicikicchā), (7) mental torpor (thīna), (8) restlessness (uddhacca); (9) shamelessness (ahirika ), (10) lack of moral dread or unconscientiousness (anottappa)”가 소개 되어 있다. 아비담마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열가지 마음의 오염은 탐욕(lobha), 성냄(dosa), 미혹(moha), 자만(māna), 사견(diṭṭhi), 의심(vicikicchā), 해태(thīna), 들뜸(uddhacca), 도덕적 부끄러움 없음(ahirika), 도덕적 두려움 없음(anottappa)에 대한 것이다. 이 중에서 탐욕, 성냄, 미혹은 오염의 뿌리에 해당된다.

 

, , 치는 가장 뿌리 깊은 오염원이다. 오염원에는 자만도 있고 견해도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도 악취 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거든

 

마음에 열 가지 오염원이 있는 한 대상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여인을 보았을 때 성적대상으로 본다면 마음이 탐욕(lobha)으로 오염된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다면 분노(dosa)로 오염된 것이다.

 

오염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오염된 마음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오염된 마음으로 정치를 평론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을 잘못 이끌 수 있다.

 

마음이 오물장 같은 자가 있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 없다.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평가자나 평론자가 되려면 최소한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허물은 감추고 남의 허물만 들추어 내려 하는 사람의 말은 믿어서는 안된다.

 

깨달은 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세상도 청정해 보인다는 말이다. 깨닫고 보니 모두 청정한 사람들이고 청정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이, 마치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바뀌듯이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호탕하게 웃었을 것이다.

 

불공정과 불의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바꾸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와 시스템을 갖추어 놓아도 사람들의 마음이 열가지 오염원으로 더럽혀져 있다면 무용지물이다. 세상을 바꾸려거든 먼저 나의 마음부터 청정하게 해야 한다.

 

 

내마음이 오염되므로

다른 사람의 마음도 오염되고,

내마음이 깨끗해지면

다른사람의 마음도 깨끗해진다.”(S22.100)

 

 

2022-09-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