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12. 06:09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소설가에게 고민이 있는 것 같다. 남의 인생을 소설화 했을 때 동의를 받는다고 한다. 반응은 다양하다고 한다. 흔쾌히 동의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할 것 같다. 감옥이 나오는 장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감옥체험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범죄를 저질러 일부러 감옥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권 쓰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권 써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족이 될수도 있고 가장 친한 사람이 될수도 있다. 어떤 인생이든지 소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영화같은 인생을 말한다.  

요즘 영화를 즐겨보고 있다. 그날 이후로 뉴스를 보지 않는다. 공중파방송은 물론 뉴스전문채널, 종편채널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케이블 채널에 머문다. 씨네프, CGV, Screen, OCN과 같은 영화채널에 머물러 있다.

영화를 보면 영화같은 삶을 볼 수 있다. 극적인 삶이다. 영화는 무어니무어니 해도 반전이다. 예측불허의 반전을 접했을 때 영화보는 맛이 난다. 인생도 반전에 반전이 있어서 한편의 영화와 같다.

나의 인생도 영화화 할 수 있을까?  나의 인생도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인생의 굴곡이 없기 때문이다. 굴곡진 인생이어야 스토리가 된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죽으면 금방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영화로 만들어지면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의 훌륭한 주인공이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흔적을 남긴다. 어떤 이는 요란하게 산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이 있다. 김지하는 자신의 젊은 날을 되새겨 보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다고 말했다. 독재정권에 저항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행했다. 감옥에서 죽을정도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조용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요란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좋을까? 세상에 태어 나면 어떤 식으로든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조용하게 산다고 해도 흔적은 남긴다.

어떤 학생이 질문을 받았다. 그것은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겠습니까?"라는 아나운서의 질문이었다. 학생은 "저는 기필코, 기필코 아버지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칠십년대 학생프로에서 본 것이다.

학생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아마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때 되면 결혼해서 자녀를 갖기 때문이다. 학생은 번식의 의무를 충실히 했을 것이다. 삶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조용필 노래를 좋아한다.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다. 가사는 철학적이다. 수많은 히트곡 중에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있다. 남자의 야망과 고독을 노래한 것이다. 무엇보다 나레이션이 좋다. 가사에서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라는 문구가 강렬했다.

나는 나의 삶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어떤 학생의 꿈처럼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삶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마치 하얀 도화지를 마주한 것처럼 나의 그림을 그려 놓고 싶은 것이 있다.

인생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되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다가 말수는 없다.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될 수 있다. 이것으로 인생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축생이나 다름없다. 축생의 최대 의무는 자손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유행화’라는 그림의 그 다양성은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은 그 걸작보다도 다양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이와 같이 ‘오랜 세월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

부처님은 우리의 마음을 유행화로 비유했다.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풍속화를 말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도화지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그사람의 다음생을 결정할 마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사람의 일생이 있다. 그녀의 일생도 있다. 아무리 평범한 일생이라고 해도 극적인 요소는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자 인생은 한편의 소설이고, 한편의 드라마이고, 한편의 영화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소설을 쓰고 있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드라마나 영화를 찍고 있다. 어떤 소설이 될지 어떤 드라마가 될지 어떤 영화가 될지는 자신이 하기에 달려 있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삶을 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사는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살아간다. 대부분 오욕락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대부분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다름아닌 축생과도 같은 삶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살아간다. 이런 삶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랜 세월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S22.100)라고 말씀했다.

세상에는 흐름이 있다. 그것은 탐, 진, 치의 삶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흐름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탐, 진, 치로 살 때 부처님 제자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역류도의 삶이다.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은 오랜 세월 탐, 진, 치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탐, 진, 치라는 물감으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이 생에서는 이런 그림을 그렸고, 저 생에서는 저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 있는 나는 흰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누구나 그림을 그린다. 누구나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또한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누구나 인생극장에서 배우가 된다. 누구나 삶에서 흔적을 남긴다. 이 모두가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이 오염된 자의 도화지는 어떠할까? 탐욕과 분노로 가득찬 자가 그리는 그림은 욕망과 파괴로 가득할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업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업을 지었을 때 업보가 따른다.

업보는 내생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이는 업식으로 설명된다. 부처님은 업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축생계의 생물들처럼 그렇게 다양한 어떠한 다른 종류의 다른 생물도 보지 못했다. 수행승들이여, 그 축생계의 생물들조차 마음에 의해서 다양해 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렇지만 그 마음은 축생계의 생물들보다 다양한 것이다."(S22.100)

 


경을 보면 "축생계의 생물들조차 마음에 의해서 다양해 진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마음은 무슨 뜻일까?

이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종의 축생이 있다. 새의 종만 해도 수천종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축생의 종보다 더 다양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여기서 마음은 한존재의 일생을 지속케 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를 존재지속심이라고 하는데 빠알리어로는 바왕가찌따(bhavaṅgacitta)이다.

존재지속심은 한존재의 정체성과도 같다. 자아가 형성되었을 때 그 마음과 지금 마음이 같은 것은 존재지속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은 결코 늙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한마음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한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나 존재지속심이 있다. 누구나 자신에게만 있는 한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성이라는 한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마음인 존재지속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은 그 걸작보다도 다양한 것이다."(S22.100)라고 말씀 하셨다.

임종 때가 되면 업식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강아지로 태어났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개가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면 자신이 개로 태어나게 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번 개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개로 살아야 한다. 도중에 다른 존재로 바뀌는 일은 없다. 이것이 존재지속심, 바왕가찌따이다.

인간의 마음은 축생계의 생물보다 다양하다고 했다. 이는 흰 도화지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마음이 탐욕과 분노로 오염된 자들은 세상을 오염시키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마치 술주정하는 것과 같고 거리에 음식을 토한 것과 같다. 이렇게 그림을 그렸을 때 주석에서는 "업의 탄생으로 그를 안내한다."(Srp.II. 327)라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인가? 업력이 그를 새로운 태어남으로 이끌어 감을 말한다.

업력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용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탄생의 뿌리에 놓인 것은 마음의 상태(cittabhava)이다. 탄생에 도달한 존재는 탄생과 동일한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태는 탄생에서 성취된다. 모태는 업의 성취라는 것을 알 수 있다."(Srp.II. 327)라고 설명했다.

인간은 업생이다. 업을 지어서 업력으로 태어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업의 탄생'과 '모태의 성취'로 설명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업의 힘에 따른 업력으로 태어남을 말한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림을 그린다.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면 세상을 더럽히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린 그림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이왕이면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마음을 청정하게 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까? 부처님은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라고 했다. 내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세상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유마경에 "심청정 국토청정(心淸淨 國土淸淨)"이 있다.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가 청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문구의 모티브가 되는 경이 니까야에 있다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가죽끈에 묶임의 경'에 실려 있는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유마경이 오리지널이 아님을 말한다.

마음이 더러우면 세상도 더러워진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세상도 청정해진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주석에서는 사념처를 닦으라고 했다.

사념처를 어떻게 닦아야 할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이와 같이 ‘오랜 세월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22.100)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관찰해야 할까?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S22.100)라며 물어 보는 것으로 알수 있다. 부처님은 문답식으로 오온에 대해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살다보면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 흔적을 남기되 세상을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내 마음이 깨끗하면 세상도 깨끗해질 것이다.

흔적을 남가지 않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마음이 탐, 진, 치로 오염되어 있어서 요원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2022-09-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