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고층 아파트 슬릿에서 바라본 일몰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11. 06:14

고층 아파트 슬릿에서 바라본 일몰은

 


오늘 일몰은 굉장했다. 그러나 안타까웠다.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 건물에 가로 막혀서 일부분만 보았다.

아파트에서 저녁노을을 제대로 보기 힘들다. 전망이 좋은 아파트라면 문제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전면을 가로 막고 있다. 그러나 틈새는 있다.

 


동과 동 사이에 틈새가 있다. 마치 세로로 길쭉한 슬릿같다. 25층짜리 아파트 틈새로 일몰이 장관을 연출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이런 때는 망해암에서 보는 일몰이 장관이다.

망해암은 안양8경에 해당된다. 망해암에 서면 서해안이 보인다. 일몰 때가 되면 서해안 바다가 은빛으로 빛난다. 오늘 같은 날에는 서쪽하늘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식탁에서 일몰을 지켜 보았다. 슬릿의 하늘이 온통 핏빛이다. 장관이라는 말과 함께 장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또 한가지 단어는 숭고이다.

밥을 먹으면서 일몰을 보았다.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저녁노을은 스러져 갔다. 마치 맹렬히 타오르던 아궁이 불꽃이 점차 소멸해 가는 것 같았다. 밥을 다 먹자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슬릿에는 어둠이 깔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너무 극적이다. 불과 20분도 안되어서 세상이 바뀌었다. 저녁노을은 짧았다. 긴 어둠이 시작되었다.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 어둠이 내려와도 대낮처럼 밝다. 어둠이 내리면 네온싸인은 기지개를 편다. 밤 새도록 놀고 먹고 마시는 환락의 세계가 펼쳐진다. 도시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오늘 넘어간 해는 동쪽에서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해가 뜨기 전에는 전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새벽이다. 새벽은 해 뜨기 전의 전조현상이다.

 


해지기 전의 전조는 저녁노을이다. 해뜨기 전의 전조는 새벽노을이다. 똑같은 노을이다. 똑같은 붉은 색이다. 하나는 탄생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일어남과 사라짐은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물질만 그런 것일까? 정신도 그렇다. 느낌과 지각, 형성, 의식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다. 우주도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오늘 우주쇼를 보았다. 아파트 슬릿에서 하늘을 벌겋게 물든 장관을 본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있을 것이다. 허공계가 다하는 한 저녁노을과 새벽노을은 계속될 것이다.

 


자연은 무심하다. 천지는 인정사정 없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 눈에도 저녁노을은 장엄하게 비칠 것이다. 살아 남은 자에게 새벽노을은 보상으로 따를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온통 붉은색 캔버스를 접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바로 앞에 서면 붉은색 물감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계속 바라보면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무한에 대한 경외와 감동과 숭고에 대한 것이다.

무한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블가사의하고 불가사량한 것이다. 알 수 없는 무한과 접했을 때 자신의 한계를 알아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환희로 바뀐다. 더 나아가 전율하게 된다. 무한을 알 수는 없지만 무한을 인식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무한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무한을 인식하는 이성이 있음을 알게 됨을 말한다. 무한의 저편을 알 수 없지만 무한을 인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 했을 때 스스로 거룩한 마음이 되고, 또한 숭고의 마음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경이롭다. 이럴 때는 '이천오백년 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는 마음이 일어난다. 나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내가 알고 있었던 알음알이가 산산조각 났을 때 두려음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크고 넓고 광대한 가르침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다.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 거룩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성이 있어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숭고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녁노을은 아름답다. 새벽노을도 아름답다. 인류가 시작되기 전에도 있었다. 누군가 노을을 보고서 감탄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노을 자체가 감탄일까? 노을은 무심하다. 노을은 사람이 보든 말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면 발생한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의미를 갖는다.

노을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넘어 장관이다. 장엄하기까지 하다. 더 나아가 숭고하다. 그러나 노을 자체가 아름답고, 장엄하고, 숭고한 것은 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자가 있어서 아름답고 장엄하고 숭고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숭고하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르침 자체로도 숭고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담마는 누가 보건 말건 숭고 그 자체이다.

누군가 가르침을 접하면 지혜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무상에 대한 두려움이고 무아에 대한 지혜이다. 두려움에 대한 지혜가 생겨났을 때 전율할 것이다. 전율은 이내 감동으로 바뀌고 숭고한 마음이 될 것이다.

 

오늘 저녁 노을은 굉장했다. 전망 좋은 높은 곳에서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러나 25층 아파트 동과 동 사이 슬릿에서 바라본 일몰은 환상적이었다. 저녁노을이 자신을 봐달라고 한적은 없다. 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있어서 숭고해 보였다.


2022-09-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