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로 사는 한 나는
또다시 새벽이다. 현재 시각은 새벽 4시 35분, 딱 좋은 시간이다. 새벽 글쓰기를 자제 하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빴다. 무려 세 개 또는 네 개의 일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초치기, 분치기가 되었다. 납기 내에 끝내고자 한 것이다.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새벽부터 나가서 에 밀린 일을 처리 했다. 고객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늦으면 늦는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신용을 잃으면, 신뢰를 잃으면 끝장이다. 보고를 잘 해야 한다.
새벽에 글쓰기를 자제했다. 일에 집중하는 것이 방해 될 까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틈새를 이용해서, 막간을 이용해서 글을 썼다.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일이 완료 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성취감을 갖게 된다. 잠시 한두시간 여유를 갖는다. 유튜브 시청으로 보낼 수 있지만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면 마음이 채워진다. 또 한번 성취감을 맛본다.
편안한 자세로 글을 쓴다. 아니 엄지치기를 하고 있다. 허리는 따뜻하다. 전기찜질기가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허리는 다 나았다.
2주전 허리가 아팠을 때 시간 지나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침을 두 번 맞았다. 전기찜질기를 사서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씻은듯이 나았다.
허리가 나으니 산행도 가능할 것 같다. 9월 18일 정진산행이 예정 되어 있다. 해발 680미터 이상의 예봉산 산행이다. 허리에 문제가 발생 했을 때는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오를수 있을까?'라며 아득하게 보였다. 지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간 지나면 해결 되는 것이 있다. 감기 같은 것이다. 허리통증도 이에 해당된다. 일도 그렇다. 처음에는 태산처럼 높게 보이지만 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끝이 보인다. 이런 것은 문제도 아니다. 진짜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진짜문제는 무엇일까? 생, 노, 병, 사에 대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대책 없다. 막을 수 없다. 휩쓸려 가는 것이다. 늙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죽을 병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죽음 앞에 저항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시인은 절규한다. 노시인은 절망을 노래하는 것과 같다. 노, 병, 사에 속수무책인 것 같다. 시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힘내세요'라는 공감 아이콘을 누르는 것이다. 이것 밖에 할 것이 없다.
누구나 죽는다. 그것도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어 간다. 나도 언젠가 그날이 올 것이다. 자신만만해서는 안된다. 자만 했을 때 불행이 닥친다. 행복한 자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의 머리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신에 의지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삶이 이렇게 꼬인 것은 업 때문일까? 전생에 지은 업장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사는 것일까? 모든 것을 업으로 돌리면 숙명론자가 된다. 숙명론자가 되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 없다.
나는 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내가 여기 있게 된 것은 부모님 때문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족하다.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이제 노년에 접어든다. 육십갑자가 지났으면 많이 산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여전히 젊다. 어느 때 나이 쯤 될까? 아마 청소년 시기 나이 같다. 청소년 시절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머리가 반백에서 백발로 진행 중에 있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있다. 매일 거울을 보기 때문에 나이든 것을 잘 모른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경악하게 된다. 노인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늙지 않는 것 같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먹고 싶지 않아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 나이는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인 것 같다. 어느 한 시점에서 딱 멈추어 버린 것 같다. 아무리 육체적 연령이 많아도 정신적 연령이 낮으면 어린 아이와 같다.
어른이면서도 아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 천진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탐, 진, 치로 살아 가는 사람을 말한다. 자아 형성이 완료 되는 청소년 시기의 마음이 지금까지 연장 되어 있다면 '어른아이'와 같은 사람이다.
나의 정신적 연령은 몇 살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청소년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정신적 연령은 제자리인 것 같다. 그것은 욕망의 삶과 관련 있다.
나이를 먹어도 욕망으로 산다면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다. 머리에 욕망으로 가득하다면 청소년 시기나 다름없다. 나이가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어도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어른이 아니다. 헛되이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 욕망을 극복해야 어른이 된다. 이런 논리라면 나이가 어려도 욕망을 극복했다면 어른이 된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바라문이여, 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초년의 젊음을 지니고 나이 어린 청년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슬기로운 장로라고 부릅니다.” (A2.37)
부처님이 말씀하신 어른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탐욕의 극복에 대한 것이다. 나이가 어려도 감각적 욕망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산다면 장로, 어른이라고 했다.
어른 같지 어른이 있다. 백발이 되었어도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아이와도 같은 것이다. 아이 때도, 청소년이었을 때도 감각을 즐기며 살았기 때문이다. 평생 감각적 욕망으로 산다면 그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어른이 아니다.
자식이 생기면 자동으로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된다. 어른이 되는 것이다. 손자가 생기면 자동으로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된다. 어른 중에서도 큰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청소년이나 다름 없다. 나이만 헛되이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른이 되고자 한다. 어떻게 해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욕망을 극복하는 삶이다. 욕망을 극복해야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 그 해법을 경전에서 찾고자 한다.
맛지마니까야를 완독했다. 육개월 걸렸다. 설렁설렁 읽은 것이 아니라 정독했다. 그래서 진도를 많이 나가지 않았다. 하루에 한경 나갔다. 모두 152 경이므로 육개월 걸린 것이다. 이를 맛지마니까야 대장정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경전읽기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한번 읽어 보았는데 번뇌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번뇌를 없애는 수행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가장 좋은 것은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는 것이다. 특히 경전을 가까이 해야 한다.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만한 것이 없다.
맛지마니까야는 방대하다. 수천페이지나되는 초기경전에는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모두 새겨 두고 싶다. 그래서일까 옛날 수행승들은 목숨 걸고 외웠을 것이다. 그 결과 부처님의 원음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
맛지마니까야를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읽었다. 새기고 싶은 문구는 글의 소재가 되었다. 이 모든 공덕을 회향하려고 한다. "모두 당신 것입니다."라고.
매일매일 글을 쓰는 것은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매일매일 경전을 읽는 것 역시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어제와는 다른 삶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각적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여전하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로 사는 한 나는 어른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어른이 될까?
2022-09-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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