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세월이 나를 버렸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1. 07:19

세월이 나를 버렸을 때

 

 

어제 저녁 재즈 페스티벌이 있었다. 안양아트센터 앞 특설무대에서 열렸다. 어제 일몰에 대한 글을 쓰느라고 끝물에 갔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문화의 향기와 젊음의 열기를 느꼈다.

 

 

나이든 사람들과 어울린다. 주로 5060이다. 그러다 보니 나이든 사람들 얼굴이 익숙하다. 늙어 보이는 사람도 자주 보면 늙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종종 2030의 젊은 사람들을 접했을 때 신선해 보인다. 그런 한편 나도 그땐 그랬지라며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 나이가 들게 되어 있다. 머리는 흰색으로 변하고 피부는 탄력을 잃는다. 세월이 나를 버린 것일까?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

 

 

에스엔에스에는 수많은 시인이 있다. 왠만하면 시인 같다. 그러나 좀처럼 가슴을 울리는 시를 보기는 쉽지 않다. 시인이라 하지만 시와 무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이런 때 니까야 경전에 있는 시를 접하면 밤하늘 달의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부처님은 훌륭한 시인이다. 어느 게송을 보아도 가슴을 울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게송에서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고 했다. 시인 중에서 이런 정도의 감수성을 가진 시인이 어디 있을까?

 

게송에서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라고 했다. 이 말은 빠알리어 “Vayoguā anupubba jahanti”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vaya’‘age; loss; decay’의 뜻이고, ‘anupubba’‘successive; gradual’의 뜻이고, ‘jahanta’ ‘leaving; abandoning’의 뜻이다. 그래서 나이는 점차적으로 우리를 버린다라는 뜻이 된다.

 

세월은 점차적으로 우리를 버린다. 중년이 되면 청년은 버려지는 것이 되고, 노년이 되면 중년이 버려지는 것이 된다. 죽을 때가 되면 어떻게 될까? 청년, 중년, 노년이 모두 버려지게 될까?

 

노년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몇 년 지나면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이 될 것이다. 지하철과 전철 프리패스가 된다면 지공거사가 된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을 말한다. 세월은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세월은 자꾸 나를 밀어낸다. 어디로 가야 할까?

 

세월이 나를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가야 하리.”(S1.4)라고 했다. 저 세상을 위한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파격적이다. 세상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다. 하늘사람, 천신은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라고 했다.

 

부처님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라고 했다. 여기서 고요함은 빠알리어 산띠(santi)를 번역한 말이다. 산띠는‘peace; calmness; tranquillity’의 뜻이다. 고요함은 궁극적 고요함을 뜻하는데 그것은 바로 열반을 말한다.

 

오늘 새벽 노을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씻지도 않고 밥도 먹지도 않고 일터로 달려 왔다. 18층 꼭대기로 올라가서 사진 촬영을 했다. 그러나 오전 611분에 새벽노을은 끝물이었다. 불과 몇 십분 놓쳐서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새벽노을은 아기와 같은 것이다. 해가 떴을 때 유년시절과 같다. 해가 오전에 있을 때 청년시절과 같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장년 시절과 같다. 해가 질 때 노년 시절과 같다. 하루 해에도 일생이 있는 것이다.

 

하루 해가 떴으니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 갈 것이다. 세월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유년를 소년으로, 소년을 청소년으로, 청소년을 청년으로, 청년을 중년으로, 중년을 노년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월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흔히 말하기를 내가 십년만 젊었으면이라고 말한다. 정말 십년 젊다면 현재와 다른 삶을 살아갈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며 사는 자에게는 십년을 더 젊게 해 준다고 해도 역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 것이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현재를 살면 내가 십년만 젊었으면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늘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는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글쓰기 한지 십년이 넘었다. 십년전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자판을 두들겼다. 오늘 아침에도 신나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세월은 흘러가고 세월은 나를 버렸지만 글로 남아 있다. 글이 남아 있는 한 세월을 붙들어 매고 있다.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나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3)

 

 

2022-09-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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