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늙음은 저주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1. 07:19

늙음은 저주인가?

 

 

하늘이 높고 맑고 깨끗하다. 흰구름이 층을 이루어 떠 있다. 구름이 적층 되어 있는 하늘은 태고적 신비를 보는 듯하다. 오늘 저녁 일몰이 굉장할 것 같다.

 

저녁 650분에 18층 꼭대기층에 올라 갔다. 도시의 일몰과 저녁노을을 촬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기대 만큼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인 저녁노을을 기대했으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것 같다.

 

 

하늘의 구름은 변화무쌍하다. 바람이 불면 형태를 달리한다. 바람이 고요할 때 적층운은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오래 가지 않는다. 어둠이 내리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은 하늘을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스마트폰에 눈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런 때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한다. 푸른 하늘의 흰구름을 봐야 한다. 어렸을 때도 보았고 학생 때도 보았고, 장년 때도 봤던 것이다.

 

 

하늘의 구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다. 조선시대 때도 있었고 삼국시대 때도 있었다. 그때도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을 바라 보았을 것이다. 저녁 석양의 해를 바라보며 무상을 생각했을 것이다.

 

지는 해는 인생무상을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지는 해는 인생의 황혼기에 해당된다. 석양의 하늘은 밝은 것처럼 보이지만 몇십분만 지나면 컴컴해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사람이 석양을 보면 슬퍼지는 것도 자신의 여생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도 나이가 들었을 때 형편없이 늙어 버린 노인이 되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늙음의 경’(S48.41)에서 확인된다. 부처님이 홀로 고요히 명상을 하다가 저녁 무렵에 일어나 서쪽의 양지에 앉아 등을 따뜻하게 대고 계셨다.”(S48.4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왜 석양에 등을 대었을까? 그것은 지는 해에 불과하지만 따뜻한 기운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 본 아난다는 부처님의 두 손과 두 발을 만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제 세존의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가 모두 이완되어 주름이 지고 몸은 앞으로 기울고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모든 능력이 변화의 조짐을 보입니다.”(S48.41)

 

 

부처님은 32상을 특징으로 한다. 최상의 진리를 설하는 당당한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나이가 80이 넘었다면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시각, 청각 등 감각능력이 저하가 나타날 것이다. 무엇보다 몸이 앞으로 기운다고 했다.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아난다의 말에 동의 했다.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러하다. 젊더라도 늙게 마련이고 건강하더라도 병들게 마련이고 오래 살더라도 죽게 마련이다.”(S48.41)라고 말하며 아난다가 한 말에 대하여 반복해 주었다.

 

경에서는 석양의 양지와 부처님의 늙은 모습을 대비시켰다. 이렇게 본다면 석양은 인생의 황혼에 대한 표현으로 적합한 듯 하다. 저녁노을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찬란한 슬픔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

 

백 세를 살더라도 결국

죽음을 궁극적인 것으로 할 뿐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S48.41)

 

 

부처님은 늙음에 대하여 부끄럽고 가련하고 추악한 것이라고 했다. 대단히 꾸밈없고 솔직한 표현이다. 주변에서 나이가 많이 든 병든 노인의 모습이 이렇다. 그렇다면 늙는 것은 노인의 잘못일까?

 

게송에서는 늙음에 대하여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라고 했다. 늙음은 부끄러운 것일까?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에잇 나쁜 늙음이여, 늙음은 아름다움을 뺏어 가나니라고 번역했다. 늙음은 나쁜 것일까?

 

늙음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주석에 따르면 빠알리 원문 “Dhī ta jammi jare atthu”에 대하여 가련한 늙음이여, 저주 받은 것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다. 저주하는 자가 그대를 만지리라.”(Srp.III.245)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유명 배우가 있다. 나이 든 배우는 좀처럼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유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나이가 들어 형편 없이 늙어 버린 유명 배우를 보면 짠하기 그지 없다. 무엇보다 나도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사람이 늙으면 외출을 자제하는 것 같다. 거의 칩거하다시피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는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일 것이다. 게송에서와 같이 늙음은 부끄러운 것이고, 늙음은 추악한 것이고, 늙음은 나쁜 것이라고 했다. 이 정도가 되면 늙음은 저주와도 같다.

 

늙음을 저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늙음을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 하는 사람 자신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주하는 자가 그대를 만지리라.”(Srp.III.245)라고 한 것이다.

 

하루 해가 지나갔다. 캄캄한 어둠이 되었다. 내일 해는 다시 뜰 것이다. 이렇게 해가 뜨고 지고 하다 보니 한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반년이 가고, 이제 9월로 접어 들었다. 조금 있으면 연말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해, 두 해 가다 보면 언젠가 형편없이 늙어 버린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누구도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다. 누구도 오는 늙음을 막을 수 없다. 누구도 보기에 부끄럽고, 보기에 가련해 보이고, 보기에 추악해 보이는 늙음을 피해갈 수 없다. 마치 저주하는 듯한 늙음에 속수무책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도처에 늙음의 대한 경이 있다. 법구경에서는 11품 자라박가(jaravagga)가 늙음의 품이다. 자라박가에 모두 11개의 게송이 있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Dhp.153)

 

 

이 게송이 왜 자라박가에 있을까? 이는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늙음, 질병, 죽음으로 거듭해서 태어나는 과정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왜 고통일까? 이는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집 짓는 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고통이 멈추지 않음을 말한다.

 

 

집 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Dhp.154)

 

 

부처님은 마침내 집 짓는 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갈애이다. 갈애로 인하여 세세생생 윤회해 왔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갈애가 발견 되었으니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집을 짓고 있다. 그것은 오온이라는 집이다. , , , , 식이라는 집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혜로 집 짓는 자의 정체를 알았다. 그것은 갈애이다. 그래서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원만한 깨달음의 지혜로 집 짓는 자의 정체를 알았으니 더 이상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라는 개체의 집을 짓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루 해가 저물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에는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가다 보면 나이를 먹게 되고 늙어 가게 될 것이다. 아니 노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한달이 다르다. 나이가 더 들면 하루가 다를 것이다. 이런 때 늙음 타령만 하고 있을 것인가?

 

늙음 타령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타령하는 사람도 늙음 타령하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 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는 늙음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늙음 타령, 세월 타령으로 보낸다면 늙음을 저주하는 것과 같다.

 

늙음을 저주하는 사람은 자신을 저주하는 것과 같다. 이는 가련한 늙음이여, 저주 받은 것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다. 저주하는 자가 그대를 만지리라.”(Srp.III.245)라는 주석이 잘 말해 준다. 늙음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추악한 것도 아니다. 늙음을 저주하는 자가 가련한 자이고 추악한 자이다.

 

늙음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늙음을 고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생, , , 사의 관점에서 늙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Dhp.153)라고 생각해야 한다. 거듭 태어나게 하는 자, 집 짓는 자를 찾아야 한다.

 

부처님은 집 짓는 자에 대하여 갈애라고 했다. 갈애로 인하여 오온이라는 집을 짓는다. 나라는 개체의 집을 짓는 것이다. 더 이상 오온의 집을 짓지 말아야 한다.

 

 

2022-08-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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