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잉어빵에도 잉어가 없다. 스님 계정에는 담마가 없다. 앙꼬없는 찐빵과 같다.
혹시나 해서 스님계정을 주욱 훝어 보았다. 그래도 담마 한구절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내려도 보이지 않았다. 부업에 대한 것과 농사지은 것에 대한 이야기만 있다.
스님은 어렸을 때 출가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것 같다. 세속사람들이 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겉모습은 출가자인데 재가자의 일을 하고 있다.
스님은 출가자인가 재가자인가? 재가의 일에 더 열중하는 것으로 보아서 재가자라고 볼 수 있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 (Sn3.9)
농사지으면 농부라고 말한다. 그림을 그리면 화가라고 한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된다. 제사를 주관하면 제관이 된다. 행위에 따라 직업이 된다. 출가자가 재가의 일을 하면 재가자라 해야 할 것이다.
출가자는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몰라도 되는 것이 있다. 담마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고 재가의 생활은 몰라도 된다. 그럼에도 재가의 삶이 궁금해서 환속한 스님도 있다.
영화 '삼사라'에 티벳불교 스님이 있다. 영화속에서 스님은 환속했다. 스님은 자신의 은사스님에게 "살아가면서 몰라도 되는 것도 있지만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라며 환속했다. 꼭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스님은 부처님을 예로 들었다. 부처님도 출가하기 전에 결혼을 했고 애도 낳았다는 것이다. 자신도 부처님과 같은 과정을 거쳐 봐야겠다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않고 몰라도 되는 것에 열을 올린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나이가 어렸을 때 출가한 스님일수록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자 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자한다면 출가자라고 볼 수 없다. 재가자가 하는 일을 해 보고자 한다면 재가자나 다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재가에서도 하찮게 여기는 일에 열중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의 본분사가 있다. 재가에서도 하찮게 여기는 일에 열중한다면 출가도 아니고 재가도 아닐 것이다. 반승반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재가의 일을 한다고 해서 전문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여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는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가 있다. 하는 일이 밥벌이가 된다면 프로페셔널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취미로 한다면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다. 출가자가 본분사는 제쳐두고 부업에 열중한다면 취미생활에 열중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체 공부는 언제 하려는 것일까?
생업을 가지고 있다. 생업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프로페셔널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글도 쓰고 있다. 그렇다고 전업작가는 아니다. 블로그에 잡문을 쓰는 블로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담마에 대한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글쓰기는 부업이다. 때로 본업보다 부업에 열을 올릴 때가 있다. 그결과 글이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는 글쓰기이다. 취미로 쓰기보다는 구도의 방편으로 글쓰기한다.
글만 쓰지 않는다.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기도 한다. 경전읽기도 병행하고 있다. 쓰기와 읽기, 외우기와 암송하기를 함께 하고 있다. 모두 담마에 대한 것이다. 담마에 대한 호기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몰라도 되는 것이 있다. 출가자라면 담마는 알아야 할 것이고 재가의 삶은 몰라도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추어에 불과한 부업에 열을 올린다면 소는 언제 키울 것인가?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M92)
깨달은 자, 부처가 되려면 세 가지가 요청된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아야 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부처가 된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pariññeyyā)’은 일반적으로 ‘교학’을 말하고, ‘닦아야 할 것(bhāvetabbā)’은 ‘수행’을 말한다. ‘버려야 할 것(pahātabbā)’은 오염원을 버린다는 뜻이다.
출가자라면 마땅히 교학과 수행과 증득에 열중해야 할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두루 알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말한다. 곧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 있는데, 이것들은 두루 알아야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버려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무명과 존재의 갈애가 있는데, 이것들은 버려야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닦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멈춤과 관찰이 있는데, 이것들은 닦아야 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명지와 해탈이 있는데, 이것들은 실현해야 할 것이다."(M149)
경에 따르면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오온’이라 했다. 버려야 할 것은 ‘무명과 갈애’라 했다. 또 닦아야 할 것에 대하여 ‘멈춤(사마타)과 관찰(위빠사나)’이라 했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실현해야 할 것은 ‘명지와 해탈’이라 했다.
흔히 말세라고 말한다. 불교에도 말세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렸을 때 말세가 된다. 테라가타에 말세를 예언하는 게송이 있다.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
미래 최후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한다. 불교의 말세를 말한다. 말세는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주석에 따르면, 해탈의 시대, 삼매의 시대, 계행의 시대, 학습의 시대, 보시의 시대 이렇게 다섯 시대가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해탈의 시대였다. 부처님 설법만 듣고서도 성자의 흐름에 든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가르침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차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탈의 시대에서 삼매의 시대로 넘어감은 무엇을 말할까? 지혜의 시대에서 선정의 시대로 퇴화하는 것과 같다. 삼매의 시대에서 계행의 시대로 내려 가는 것은 선정의 시대도 끝났음 말한다.
계행의 시대에서 학습의 시대로 넘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석에서는 “탐욕 등의 욕망 때문에 계행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고 학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Thag.A.III.89)라고 했다. 계, 정, 혜 삼학은 없고 오로지 교학만 남은 불교를 말한다. 수행이 없는 불교이다.
학습의 시대가 지나면 보시의 시대가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체 학습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부처님 가르침은 흔적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승가에 더 이상 부처님 가르침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승려들은 무엇을 할까? 그때부터 재물을 모아 보시로서 베푼다고 한다. 사실상 재가자가 되는 것이다. 이를 보시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보시의 시대가 최후의 시대(kālamhi pacchime)에 해당된다.
최후의 시대가 되면 불교는 흔적만 남는다. 일본불교가 연상된다. 스님들이 머리를 기르고 양복입은 모습이다. 행사가 있을 때 가사를 입는데 흔적만 남은 것이다. 가사가 마치 악세사리처럼 목에 걸치게 되어 있다. 승려들이 재물을 모아서 보시로서 베푸는 보시의 시대, 최후의 시대를 일본불교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스님의 계정에는 담마가 없다. 기대를 가지고 주욱 내려 보았어도 한구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대신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한 부업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스님은 나이가 어려서 출가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세상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것 같다. 몰라도 되는 것들을 하고 있다. 알아야 할 것들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스님에게서 최후의 시대를 보는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일까?
“세상에 많은 위험이 다가오는 미래에 나타나리니, 잘 설해진 가르침을 어리석은 자들이 오염시키리라.”(Thag.954)
2022-09-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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