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왜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15. 07:17

왜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하는가?

또다시 새벽이다. 지금 시각은 3시 37분이다. 너무 이른 것 같다. 네 시대가 가장 좋다. 그러나 잠에서 깼을 때 몇 시대인지 가늠할 수 없다.

더 자려하나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 왔을 때 가만 있을 수 없다. 이런 때는 일어나야 한다. 먼저 물을 한잔 들이킨다. 어제 저녁에 만들어 놓은 보리차물이다.

보리차는 간단히 만든다. 전기포트에 옥수수차용 옥수수를 십여개 넣으면 된다. 다음으로 십년환을 먹는다. 서산 보광당 한약방에서 만든 환약이다. 장에 좋은 약이다.

십년환을 먹고 나면 속이 편하다. 아마 이것도 생각일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환약은 공복에서 작용을 할 것이다. 아직까지 소화문제로 고생한 적이 없다. 최근 일년 이상 위장에 탈이 나서 설사한 적이 없다. 환약을 열심히 먹어서 그런 것일까?

경행을 했다. 작은 방에서 오보도 안되는 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게 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할 수밖에 없다. 더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경을 암송해야 한다.

새벽시간에는 암송하기 좋은 환경이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은 철철 남아 있다. 급하게 쫓기는 것도 없다. 평온한 마음 상태에서 나지막히 "땀 맘 빠히땃땅"하며 빠다나경을 암송한다.

경을 암송하면 자연스럽게 집중이 된다. 외운 것을 기억해 내어서 암송하는 것 자체가 집중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천히 암송했을 때 이십분가량 걸린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새벽예불과 같은 것이다.

경을 암송하고 나면 집중이 된다. 이 집중된 힘을 경행에 적용하면 행선이 된다. 걷는 것도 명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행선을 워킹메디테이션(Walking Meditation)이라고 한다.

경행과 행선은 다른 것이다. 경행은 가볍게 걷는 것이지만 행선은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걷는 것이다. 걷는 것 자체가 수행이다. 발의 움직임 한동작한동작을 알아차려야 한다.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붙이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을 관찰 했을 때 이 세상에는 움직임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번뇌가 일어날 수 없다. 설령 번뇌가 일어 나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발의 움직임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번뇌는 무너진다.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한 번뇌는 발 붙이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번뇌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오염원과 같다. 빠알리어로 낄레사(kilesa)라고 한다. 낄레사를 때로 번뇌로 번역하기도 한다.

열 가지 낄레사가 있다. 어제 낄레사에 대한 글을 썼는데 새벽이어서일까 빠알리어 단어가 떠오른다. 나열하면 로바, 도사,  모하, 마나, 딧티, 비치깟차, 티나, 웃땃짜, 아히리까, 아놉땃빠이다. 이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견해, 의심, 해태, 들뜸,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창피함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새벽에는 열 가지 오염원이 없는 상태가 된다. 한숨 자고 나면 마음이 정화 되어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 상태는 오래 가지 못한다. 외부 자극에 쉽게 무너진다. 눈이나 귀 등 다섯 가지 감각대상에 의해서 자극 받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마음의 문만 열려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마음이 정화되어 있다 보니 아름다운 마음만 떠 오르는 것 같다. 선법이 선법을 부르는 것 같다. 경전에서 봤던 문구가 떠오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밴드에서 봤던 어느 스님의 글도 떠오른다.

빤냐완따 스님 글은 읽을만하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담마와나선원 밴드가 있다. 빤냐완따 스님이 오랜만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수행과 관련된 글이다. 새벽에 스님 글이 생각나는 것은 왠일일까? 그것은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는 마음과 관련한 것이 그렇다. 스님은 먼저 깨어 있는 마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새벽녘 첫눈을 뜨는 순간에 의식(識, Viññāṇa)은 활동을 개시합니다. 그 어디서 그 무엇을 하든 조건을 따라 매 순간마다 6식 가운데 하나가 나타나 식(識)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깊은 밤 잠들기 직전까지 그 활동은 계속됩니다. 가수면(선잠) 상태에서도 의식(識)은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숙면에 들었을 때 비로소 의식은 활동을 중지합니다. 수행(修行)은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잠든 상태에서는 공부도 할 수 없고 수행도 할 수 없고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통한 지식의 축적이나 수행을 통한 지혜의 성숙은 깨어있을 때만 가능합니다."(빤냐완따 스님)

빤냐완따 스님은 의식(Viññāṇa)에 대해서 깨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잠들어 있으면 무의식이기 때문에 수행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선종에 말하는 '몽중일여'를 부정하는 말과 같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의식을 하게 된다. 의식이 없을 때, 즉 무의식 상태도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바왕가, 즉 잠재의식상태라고 한다. 의식이 잠자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의식과 바왕가를 왔다갔다 한다. 이에 대하여 빤냐완따 스님은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으로 설명했다.

아는 마음은 의식이 있는 상태이다. 모르는 마음은 바왕가의 상태이다. 바왕가는 잠재의식 상태이다. 의식이 쉬는 상태 또는 의식이 잠자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수면 아래 상태로 본다.

바왕가의 마음이 기반이 되어 의식이 일어난다. 바왕가는 한존재의 기본이 되는 마음이다. 한존재의 정체성이 바왕가의 마음이다. 그래서 바왕가의 마음을 존재지속심이라고 한다.

나의 바왕가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나를 나이게끔 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하나의 마음이 있는데 이를 바왕가의 마음이라고 한다.

선종에서는 불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한마음을 말한다. 어떤 존재에게나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에는 불성과 같은 공통된 하나의 마음이 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니까야 도처에서는 한존재에게 하나의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한존재의 일생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바왕가의 마음, 존재지속심 또는 잠재의식이라고 말한다.

바왕가는 그 사람의 정체성과 같다. 그 사람의 성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재성향은 열 가지 낄레사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잠재되어 있는 잠재성향을 말한다.

사람에 따라 성향은 다르다. 어떤 이는 탐욕의 성향이 강하고 또 어떤 이는 분노의 성향이 강하다. 어떤 이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양심이 마비된 사람과 같아서 축생과 다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성향이 다르다. 자신만의 고유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와같은 일생의 마음을 바왕가의 마음, 즉 존재지속심 또는 잠재의식이라고 한다.

나의 잠재의식은 어떤 것일까? 나의 잠자는 의식은 어떤 것일까? 더 나아가 나의 수면 아래에 있는 의식은 어떤 것일까? 이는 열 가지 낄레사로 설명될 수 있다. 열 가지 오염원에 얼마나 오염되었는지로 알 수 있다. 탐욕과 분노, 미혹, 자만 등 열 가지 오염원에 오염되어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각자 성향이 다른 것이다.

한번 형성된 성향은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조건이 맞으면 성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개버릇 남못준다'는 말이 있다. 이는 한존재의 일생을 지배하는 바왕가의 마음, 즉 존재지속심 또는 잠재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마음이 있다.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이다. 아는 마음은 의식이 있는 마음, 즉 분별하는 마음이다. 모르는 마음은 바왕가의 마음이다. 수면아래의 마음의 마음이다. 바왕가가 동요되면 의식이 있게 된다. 분별하는 마음이다. 이를 빈냐나(Viññāṇa)라고 한다.

본능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감정에 충실한 사람도 이에 해당된다. 이는 성질대로 사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질대로 사는 사람은 잠재된 성향대로 사는 사람과도 같다. 이는 바왕가의 마음대로 사는 것과 같다. 각자 잠재된 성향이 있는데 이는 열 가지 오염원에 물든 마음이다. 그래서 깨어 있을 때는 늘 알아차려야 한다. 빤냐완따 스님은 알아차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설명한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지각인식(想, 산냐)>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알음알이, 판단식, 결정식, 분별식>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판단ㆍ분별해서 알게 된 것을 '단지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그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 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아는) 앎' 입니다."

 


모두 다섯 가지 아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두 번째 단계인 분별식에서 머문다. 수행을 하면 세 번째 단계인 '단지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의 상태가 된다. 사념처 수행으로 가능한 것이다.

수행을 하면 아는 마음은 깊어진다. 가장 흥미 있는 것은 네 번째 단계인 '그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자면, 강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둘중 한 사람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남은 한 사람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감각기능이 순일해지고 흙탕물같던 마음이 샘물처럼 맑고 고요해지면 알아차림의식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고 정밀해지면서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이 생겨납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이를 지켜 보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앎이 앎을 알고 그 앎을 또다른 앎이 지켜봅니다. 일순 앎이 사라집니다. 하나의 앎이 사라지면 뒤에서 지켜보던 앎이 사라지고, 그것을 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앎마저도 사라집니다. 그로인해 앎의 연속적 소멸을 보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아는 마음도 무상하고 지켜보는 마음도 무상하다. 그럼에도 지켜 보는 마음에 대해서 한마음이라거나 궁극적 실재라고 말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섯 번째 단계는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아는) 앎' 이라고 했다. 이를 통찰지(Paññā 또는 ñāna)라고 한다. 이와 같은 통찰지에 대해서 빤냐완따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앎(智)>은 <오온현상>을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로서 꿰뚫어 알게 해줍니다. 제행(諸行, 일체 현상, Sabbe-saṅkhārā)는 무상합니다. 식(識, Viññāṇa) 또한 무상합니다. 모든 것은 조건을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을 따라 소멸합니다. 이처럼 통찰지는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본래 괴로운 것을 괴로운 것으로 보게 해주며, 본래 영속적 실체를 가진 식(識)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러한 통찰지를 발판으로 하여 꾸준히 정진하다보면 마침내 도(道)의 지혜, 과(果)의 지혜를 증득함으로써 생사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통찰지는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는 마음도 없고 지켜 보는 마음도 없다. 바왕가의 마음도 없고 한마음도 없다. 세상만물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재도 있을 수 없다. 조건 지어진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통찰지라는 것이다.

여러 단계의 마음이 있다. 나는 어느 단계에 있을까? 일상에서는 두 번째 단계인 분별식으로 살아간다. 성향대로 사는 것이다. 성향대로 사는 것은 성질대로 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해야 한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새벽에 행선하는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것이다. 발의 움직임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면 자신을 마치 제3자처럼 지켜 보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켜보는 마음조차 무상한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도와 과를 이룰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관찰하여 도와 과를 이루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이고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이다.
상인이 훌륭한 말을 다루듯,
그대는 자기자신을 다스리라.”(Dhp.380)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하거나 불보살에 의지한다. 그런데 자기자신에게 의지하라니! 더구나 자신을 안내자로 삼으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도와 과를 이루어 성자의 흐름에 들면 가능함을 말한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면 지위가 있는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더구나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옅반에 들게 되어 있다. 이쯤 되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D16.54)라고 한 것이다.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교인이 된다. 처음에는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삼보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을 의지처로 하여 살게 된다. 성자가 된 자신을 의지처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의지처가 된다는 사실이다. 도와 과를 목표로 하는 수행이 될 수밖에 없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면 완전한 열반의 길로 가게 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예류자에서 일래자로, 일래자에서 불환자로, 불환자에서 아라한으로 가게 된다. 자신을 의지처로 완전한 열반의 길로 가게 되는데 이는 성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등불이 되고, 자신이 안내자가 되고, 자신이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지금 시각 6시 14분이다. 엄지로 치다보니 2시간 40분가량 쳤다. 이것도 집중일 것이다. 집중은 수행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글 쓰는 것도 수행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글쓰기이다. 글을 정리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오늘 하루는 새벽 3시부터 시작했다. 새벽시간을 활용하면 시간을 버는 것 같다. 아침 6시까지는 온전한 내 시간이다. 철철 남는 시간에 글을 쓰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글은 남는다. 시간이 글에 녹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이 글이고 곧 글이 시간인 것이다. 글이 남아 있는한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

2022-09-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