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오온을 다 관찰할 수 있는 행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30. 07:02

오온을 다 관찰할 수 있는 행선

 


등짝이 따뜻하다. 전기찜질 매트 위에 있다. 평소 한기를 자주 느낀다. 이럴 때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황토방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런 때 전기찜질 매트만한 것이 없다.

등이 따뜻한 것은 빠라맛따이다. 실재 또는 실제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를 화대라 할 수 있다. 지, 수, 화, 풍 사대 중의 화대이다.  이와같은 화대를 궁극적 실재, 빠라맛따라고 한다.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 참나라고도 한다. 갖가지 명칭이 있다. 이것 등 부르기 나름이다. 그런데 느낌을 떠나 있다면 빤냣띠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언어적 개념이다. 오로지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빠라맛따와 빤냣띠, 위빠사나 수행에서 늘 말해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라고 한다. 수행보고를 할 때 참나 어쩌구저쩌구한다면 지적 받는다. 차가운 느낌이면 차갑다고 말해야 하고 뜨거운 느낌이면 뜨겁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 하시오."라고 말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있다. 대상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되고, 대상을 관찰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대상은 고정되어 있다. 대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개념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개념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당연히 병에 걸리지 않는다. 개념은 영원한 것이다. 참나라고 하는 것도 영원한 것이다. 오로지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위빠사나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는 실제를 보는 것이다. 빠라맛따담마의 특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로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온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오온관찰이 왜 진실인가? 이는 빠라맛따담마의 특성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상으로 나타난다. 무상한 것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만족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무상한 것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이것이 무아이다.

존재는 세 가지 특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상, 고, 무아를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이에 행선만한 것이 없다.

위빠사나 수행에는 좌선과 행선이 있다. 법을 보기에는, 빠라맛따담마를 보기에는, 궁극적 실재를 보기에는 행선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는 빤냐완따 스님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걷는 수행(행선)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오온>의 <색온> 가운데 풍대(風大)를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의 무거움은 지대(地大), 바닥에 닿을 때의 따뜻함은 화대(火大), 발바닥의 끈적거림을 알아차림한다면 수대(水大)를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발이 들리고 나아가고 땅에 닿을 때의 좋은 느낌ㆍ싫은 느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수온>, 발이 들릴 때는 '듬' 나아갈 때는 '나아감' 내려놓을 때 '내려놓음' 이라는 지각인식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상온>, 걷기 직전 걸으려는 의도나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리려는 의도를 알아차림하는 것은 <행온(行蘊)>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아는 마음이 <식온>이며, 그 아는 마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식온>을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빤냐완따 스님)

 


이 글은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인 빤냐완따 스님이 기고한 글에서 행선에 대한 것만 가져 온 것이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행선을 하면 오온을 모두 다 알 수 있다.

행선에서 색온은 지, 수, 화, 풍 사대를  관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수온은 발바닥에 닿는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상온은 느낀 것을 지각함으로써 알 수 있다. 행온은 발을 이동할 때 의도가 일어나는데 의도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이 모든 과정을 아는 마음이 있는데 이는 마음관찰에 해당된다.

빠라맛따담마를 관찰하는데 있어서 좌선보다 행선이 유리하다. 그래서일까 빤냐완따 스님은 행선을 통해서 법의 성품을 더 잘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좌선만 하다 보면 대상에 집중하기 쉽기 때문에 사마타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좌선할 때 호흡을 관찰한다. 단지 들숨과 날숨만 관찰하면 사마타가  되기 쉽다. 좌선이 사마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빤냐완따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호흡을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의 감각이나 배의 불러오는 감각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색온>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때의 좋은 느낌ㆍ싫은 느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수온>을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 들숨ㆍ날숨ㆍ부름ㆍ꺼짐이라는 관념, 눈감은 상태에서 코나 배의 이미지 또는 인습적 명칭으로 들숨ㆍ날숨ㆍ부름ㆍ꺼짐을 지각인식하는 것은 <상온>, 공기를 들이키려는 의도나 굽은 허리를 곧게 펴려는 의도는 <행온>, 그리고 (이 모두를) 아는 마음은 <식온>이며, 그 아는 마음을 알아차림하는 것은 <식온>을 관찰하는 것이 됩니다."(빤냐완따 스님)

호흡관찰에는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의 길이 있다. 단지 들숨과 날숨만 관찰하면 사마타의 길로 가는 것이다. 호흡관찰이 위빠사나가 되려면 "코끝을 스치는 공기의 감각"을 관찰하라고 했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아닌 오온에 대한 관찰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빠라맛따담마, 즉 궁극적 실재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지혜이다.

오늘 새벽에 암송과 행선을 했다. 암송하는 것은 사마타에 해당된다. 일종의 법수념이다. 행선하는 것은 위빠사나에 해당된다. 놀랍게도 빤냐완따 스님에 따르면 행선은 오온을 모두 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인터뷰할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관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세요."라는 말이다. 언어로 개념화 된 것은 실재 또는 실제가 아니다. 오로지 생각속에만 있기 때문에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개념을 대상으로 수행한다면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을 이룰 수 없다.

탐, 진, 치에서 벗어나야 해탈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열반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을 관찰해야 한다. 탐욕이나 성냄 등 지금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때그때 관찰하는 것이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았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2022-09-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