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는데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지금 시각은 새벽 5시 9분, 창밖에는 어둠이 깔려 있고 대로에서는 가끔 질주하는 차 소리가 들려 온다.
오늘 새벽 4시 17분에 시간을 확인 했다. 어제 보다는 한시간가량 늦게 확인했다. 적절한 시간이다. 더 잘 수 있으나 낭비라고 생각했다. 가만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럴 때는 일어나야 한다.
경행을 했다. 경행만 해서는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비법을 사용해야 한다. 어쩌면 나만 아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평소와는 다르게 빠른속도로 암송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암송한 것이다. 그럼에도 소리 내서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암송하고 나면 확실히 집중된다. 발을 움직일 때 동작 하나하나 알아차림이 강해진다. 마치 좌선에서 호흡을 따라 가는 것 같다.
사띠는 호흡이라는 기둥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송아지를 말뚝에 밧줄로 묶어 두는 것과 같다. 송아지는 밧줄의 길이만큼만 풀을 뜯을 것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두는 것이다.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호흡을 따라 간다는 것은 몸관찰하는 것과 같다. 마하시전통에서는 호흡대신에 복부를 관찰하라고 한다. 호흡에 따라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배의 움직임, 즉 풍대를 관찰하는 것이다. 사마타가 아닌 위빠사나를 하기 위한 것이다.
주로 행선을 한다. 나에게는 행선이 더 맞는 것 같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좌선과 행선을 동등하게 여긴다. 좌선을 한시간 하면 반드시 행선을 한시간 하라고 말한다. 좌선 못지않게 행선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왜 그럴까? 행선은 법의 성품을 보기 쉽기 때문이다.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몸관찰 뿐만 아니라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도 된다. 한꺼번에 사념처 관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또한 오온의 관찰도 된다. 발을 움직일 때 경쾌함은 풍대, 즉 바람의 세계가 관찰된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을 때는 느낌이 관찰된다. 느낀 것을 아는 것은 지각이다. 무엇보다 의도를 관찰할 수 있다. 발을 떼려고 할 때 의도가 있어서 떼는 것이다. 의도가 일어나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이 모든 과정을 아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은 분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암송과 행선을 50분 가량 했다. 행선 중에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발의 움직임에 마음이 가 있지만 한편으로 어제 들은 일묵스님 법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마음이 마치 멀티태스킹 작업하는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행선할 때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불선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집중되었을 때 지혜가 생겨나는 이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
어제 유투브에서 본 일묵스님의 법문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는 '삼승삼색 특별강연(https://youtu.be/NEsMKcxSZko)'에 대한 것이다. 일묵스님은 40여분 동안 말했는데 하나하나 새겨두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 중에서 '존재자체가 괴로움이다.'라는 말에 깊게 공감했다.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의 경(M49)’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부처님이 바까하느님(Baka Brahma)와의 대화에서 말귀를 못알아 듣는 바까 하느님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창조주 행세를 하며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상, 락, 아, 정’이라는 삿된관념을 가진 바까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은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았다고 했다.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존재 하는 것은 반드시 무상하게 소멸 되어 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원한 자아가 있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결국 소멸되고 말것이기 때문에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는 것이라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결국 끊임 없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이다.
종종 유투브에서 법문을 듣는다. 어떤 이는 현존에 대해서 말한다. 대상과 합일의 경지에 대한 것이다. 인도 성자들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미국의 영성가들이 말한것과도 다르지 않다. 한참 듣고 있다보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라는 반발심이 생겨난다.
합일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합일에 따른 현존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나의 괴로움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상, 락, 아, 정으로 묘사했을 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고성제를 설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존재자체가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이렇게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 누군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사고와 팔고로 비추어 본다면 고성제가 틀림없는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흔히 이 세상을 고해의 바다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자체가 괴롭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장 먼저 고성제를 설한 것은 존재자체가 괴롭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먼저 괴로움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괴로움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먼저 존재자체가 괴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괴로움을 절절하게 느낄 것이다. 괴로움 그 자체인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이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로 인한 괴로움인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이다. 한번 형성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형성에 따른 괴로움인 행고성(行苦性, saṅkhāra-dukkhatā)이다. 이와같은 괴로움의 속성을 안다면 "존재자체가 괴로움이다."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
무엇이든지 하나를 제대로 알면 나머지 것들도 알게 되어 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철견하면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 그래서 쌍윳따니까야에서는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라고 했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존재자체가 괴롭다고 보는 것은 커다란 인식의 전환이다. 또 한편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매일 새벽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왜 그럴까? 그 순간만큼은 번뇌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일상이 시작되면 또다시 번뇌에 지배당한다. 그럼에도 또다시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는 것은 좋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맛에 대한 갈애가 있다. 한번 맛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수행체험도 그렇다. 수행을 해서 법의 맛을 봤다면 다시 맛보려고 할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사띠에 해당된다.
번뇌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법의 맛을 봐야 한다. 법의 맛을 보면 다른 것은 시시하게 보일 것이다. 감각적인 대상을 보아도 그런 줄 알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런 경지에 올라갈까?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의 맛을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
2022-10-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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