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때
오늘 점심 때 운전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탐욕 하나만 없어도 인생이 편할 것이라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독인 것을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절실히 아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탐욕이 탐욕인줄 알아서 탐욕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은퇴 후에 또는 정년 후에 마땅히 할 것이 없어서 소일거리로 주식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실제로 사촌형님은 주식을 열심히 하고 있다. 소액이지만 공부를 열심히 함을 말한다. 그런 형님에게 주식을 하지 말라고 했다. 주식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사는 방법도 모두 다 다르다. 주식하지 말라고 했을 때 견해가 될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말이 될 수 있다. 아무에게나 주식하지 말라고 말하면 꼰대가 될 수 있다.
자식이 주식한다는 말을 들었다. 주식의 폐해를 알고 있기에 그만 두라고 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장문의 문자를 남겼다. 주식투자하면 폐가망신할 수 있다고 겁을 준 것이다. 이런 것도 꼰대 짓일 것이다. 꼰대 짓 해도 주식은 결코 그만 두지 않는 것 같다. 소액이라고 하지만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될 수 있다.
주식을 그만 둔 것은 더 이상 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소액으로 했지만 가면 갈수록 커졌다. 나중에는 빚을 내서 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큰 금액은 아니다. 억단위는 아님을 말한다.
노름꾼은 돈이 떨어져서야 손 털고 일어난다. 주식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더 이상 베팅할 돈이 없을 때 그제서야 그만두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추동하는 요인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탐욕이다.
흔히 “A는 B이다.”라고 말하면 오류가 있기 쉽다. 나의 경험을 비추어서 “주식은 탐욕이다.”라고 말했을 때 헛점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식은 탐욕임에 틀림 없다.
주식을 손절한지 오래 되었다. 아마 2007년 정도 된 것 같다. 금쪽 같은 여유돈을 다 털어 먹었을 때 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조금씩 이익을 보았다면 더 오래 했을 것이다. 빨리 털린 것이 그마나 잘된 것인지 모른다.
주식을 손절함과 함께 부자에 대한 꿈도 버렸다. 개인사업을 하면서 고정적인 수입이 없게 되자 계획적인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장사하는 사람처럼, 운전하는 사람처럼 언제 어떻게 손님이 올 줄 모른다. 어떤 때는 몰려서 오지만 어떤 때는 파리만 날릴 때도 많다. 이렇게 수입이 들쭉날쭉하니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그때그때 벌어 먹고 사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주식을 손절하니 마음이 편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니 마음이 역시 편했다. 이를 ‘포기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포기의 미학은 어떤 것일까?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포기의 미학에 대한 글은 많지 않다. 구글 검색하다가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글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포기하면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꽉 움켜 쥐고 있던 것을 놓아 버렸을 때 해방감을 느낀다. 그동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하나 둘 깨지기 시작할 때 놓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을 유폐하여 어둠속에 가만 있다 보면 편안함을 느낀다. 포기의 미학이다.”
이 글은 누구의 글일까? 놀랍게도 내 글이다. 내가 쓴 글을 보고서 내가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시기도 얼마 되지 않았다. 2020년 4월에 쓴 글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주제로 고민한 것 같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바빴다. 자연스럽게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하나 버렸는데 삶이 너무 편해졌다는 사실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된다. 미리 걱정할 필요가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 없다.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볼 일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도 많은데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나에게 번뇌가 될 것이다.
일인사업자로 산지 15년 되었다. 동시에 주식하지 않고 산지 15년 되었다. 이 두 가지만 하지 않아도 살 맛 난다. 부동산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주식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 놓은 것이다.
그제부터 율장읽기 시동을 걸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몇 년 걸릴 것 같다. 탐욕과 관련하여 율장 대품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았다.
“세상에 탐욕을 여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뛰어넘음이 행복이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교만의 제거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다.”(Vin.I.3)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해탈의 지복을 누리고 있었다. 세번째 무짤린다 나무 아래에서 이레 동안 해탈의 지복을 누릴 때 바라문 학인의 모습으로 바뀐 용왕 무짤린다에게 말씀 하신 것이다.
게송에서 “세상에 탐욕을 여의고”라고 했다. 이 말은 주석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진 상태이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에서 탐욕을 여의었다는 말은 동시에 성냄도 여의고 어리석음도 여의었다는 말을 뜻하다. 탐욕이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를 잘 하면 나머지 것들도 잘 하게 되어 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철견하면 나머지 진리도 자연스럽게 자동으로 아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수십가지 불선법 중에서 탐욕을 소멸하게 했다면 동시에 분노도 미혹도 소멸된 것과 같다.
게송에서는 탐욕을 여의면 감각적 욕망도 뛰어 넘는다고 했다. 여기서 감각적 욕망은 까마(kāma)를 말한다. 까마는 초기경전에서는 오욕락이라고 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까마는 성적욕망과도 관련이 있다. 영어로는 ‘sexual enjoyment’라고 한다. 까마는 단독으로 쓰이기 보다는 욕망을 뜻하는 라가가 붙어서 까마라가(kāma-rāga)가 된다. 이와 같은 까마라가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번역했다.
욕망도 욕망 나름이다.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이 있는가 하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도 있다. 전자는 라가가 되고 후자는 까마라가가 된다. 어느 것이든지 쥐고 있으면 번뇌가 된다. 번뇌가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으면 편하지 않다.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버려 버렸을 때 마음이 편하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욕망을 버렸을 때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은 생명과 생존과 관련이 있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은 생명과 생존에 대한 욕망이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번식과 관련이 있다.
감각적 욕망을 내려 놓으라고 했을 때 까마는 물론 까마라가까지 내려 놓아야 한다. 이 정도가 되었을 때 돌아 오지 않는 경지가 된다. 불환자가 되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가 되면 부부생활은 곤란해진다. 이혼을 하고 출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장 나중에 사라지는 오염원이 있다. 그것은 자만이다. 성자의 흐름의 단계에서 유신견이 타파되어 내가 있다는 견해는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미세한 번뇌는 남아 있다. 자만이라는 번뇌를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우월적 자만에 해당된다.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을 말한다.
누군가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자기자신이 자신을 잘 알 것이다. 자신이 예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은연중에 “내가 예류자인데.”라는 자만이 생겨나게 된다. 이는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다.
여기 박사가 있다.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박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은 결코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한편 마음 한켠에서는 “내가 박사인데.”라는 자만이 있을 것이다.
자만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탐욕과 성냄이 소멸되었어도 자만만큼은 끝까지 남아 있다. 아라한이 되어야 사라진다. 그런데 이런 자만은 어쩌면 아라한이 될 때까지 추동력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하나만 버려도 인생이 편해진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면 더 편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을 내려 놓았을 때 이를 최상의 행복(parama sukka)이라고 했다.
오늘 점심 때 탐욕 하나만 없어도 인생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내려 놓은지는 오래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점심 때 문득 떠 오른 탐욕은 까마라가라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내려 놓으면 인생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 되었을 때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될 것 같다. 또한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것 같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S43.1)라고 했을 것이다.
2022-10-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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