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느낌이 없는 것이 최상의 행복인가?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이제 난방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파트에서도 난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기장판은 있어야 한다. 수년전에 구입한 극세사 전기장판은 황토구들방 못지 않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위에는 얇은 내복을 입었다. 바지는 두꺼운 것으로 입었다. 두툼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일터에서는 히터를 가동했다. 불과 일주일만이다. 여름 더위에 대한 괴로운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해도 달도 없는 세계가 있는데
오늘 새벽 잠에서 깨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주로 담마에 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불편하면 불선법이 지배한다. 몸과 마음이 편하면 선법이 떠오른다. 열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제 밤에 하늘을 보았다. 보름달은 아니지만 보름에 가까워지는 달을 보았다. 달력을 보니 음력으로 18일이다. 이지러지는 달이다. 그럼에도 도시에서 둥실 떴다. 달이 쟁반처럼 크게 보였다.
아침이 되면 해가 솟는다. 밤이 되면 달이 솟는다. 해와 달이 있어서 낮과 밤이 바뀐다. 해와 달도 없는 세계가 있을까? 우다나에 이런 게송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Ud.80)
부처님은 태양도 없고 달도 없는 세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Ud.80)
부처님은 죽는 것도 없고 나는 것도 없는 세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마지막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의지처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0)
부처님은 전생을 여의고 대상을 여의는 세계가 있다고 했다. 더구나 그 세계는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했다.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 세계는 다름아닌 열반의 세계이다.
열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열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직 열반을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 묘사해 놓았기 때문이다.
열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말로서 설명해 놓았다. 비유로서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무위상윳따’(S43)를 보면 갖가지 비유로 열반을 설명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열반은 안전하기가 섬과 같은 것이고, 열반은 안온하기가 동굴같다는 등의 표현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당연히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 된다. 열반이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정법시대 조건을 열반으로 보고 있다.
정법시대란 무엇인가? 빠알리 삼장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고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팔정도 수행법이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열반과 사향사과를 증득 했을 때 정법시대로 본다.
우다나 열반 게송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말은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했다. 이 말이 가장 와 닿는다. 열반은 괴로움의 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열반은 윤회의 종식이기도 하다. 이는 “전생(轉生)을 여의고”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결국 윤회에 속한 모든 괴로움의 종식이 열반인 것이다.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는데
괴로움은 즐거움의 반대말이다. 괴로움의 종식은 최상의 행복이라는 말도 된다. 이 말은 초기경전에서도 확인된다.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Dhp.204)라고 했기 때문이다.
열반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말한다. 물질을 구성하는 지, 수, 화, 풍 사대도 없고 해와 달도 없다고 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라고 하여 없는 것이 두 번 있다. 이는 무색계의 무소유처도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없음으로 끝나는 열반에서 열반을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은 무엇을 말하는가? 느껴서 아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있을 때 행복한 상태가 된다. 열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당연히 느낌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즐거운 느낌을 뜻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했을까?
사리뿟따 존자를 가르침의 장군이라고 한다. 부처님을 닮은 자이기 때문이다. 바라문 셀라가 “누가 당신의 장군입니까?”(Stn.556)라고 물어 보았을 때 “그가, 곧, 여래를 닮은 자입니다.”(Stn.55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가르침의 장군 사리뿟따는 부처님을 대신해서 종종 설법했다. 하루는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열반이 행복이라고 했다. 이에 어느 수행승이 의문을 가졌다. 그 수행승은 “벗이여, 싸리뿟따여,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있는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A9.34)라며 물었다.
열반은 어떤 상태일까? 해와 달도 없는 세계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선정에서는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상태로 설명되어 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선정의 상태, 상수멸정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있는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의문한 것이다.
오욕락도 열반이라고?
사리뿟따 존자는 수행승의 의문에 어떻게 답했을까? 사리뿟따 존자는 아홉 가지 행복을 말했다.
가장 첫번째 행복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행복이다. 눈과 귀 등으로 느끼는 오욕락을 말한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이와 같은 오욕락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가짜 열반이다. 감각적 쾌락을 열반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매혹적인 형상을 보았을 때 즐거움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것도 행복일 것이다. 신체적 접촉으로 즐거움이 일어났을 때도 행복일 것이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이런 것도 열반이라고 말한다. 술에 취해서 기분 좋은 상태도 열반이라고 할 것이다. 그때 술은 열반주가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는 가짜열반이다. 그래서 현법열반론자들은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D1.91)라고 말한다.
현법열반은 자아에 기반한다. 자아에 기반하여 오욕락을 즐길 때 열반의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D1.91)라며 비판 했다.
선정도 열반이라는데
사리뿟따 존자가 말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색계와 무색계 선정에 대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들 선정 상태에 대해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라고 했다. 이 말은 빠알리 문구 “āvuso,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sukhaṃ nibbānaṃ.”를 번역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라고 번역했다.
니까야를 보면 색계와 무색계 여덟 가지 선정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더 나아가서 여덟 가지 선정에 대하여 열반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는 빠알리 문구 “veditabbaṃ yathā sukhaṃ nibbānaṃ”라는 말 때문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veditabba’는 ‘should be known’의 뜻으로 ‘알려진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은 열반과 같은 의미가 되지만 “행복이 열반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긍정적 언표의 한계로 본다.
행복을 열반과 동급으로 본다면 현법열반, 즉 유사열반 또는 가짜열반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서 확인된다. 경에 따르면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D1.91)라고 보기 때문이다.
선정에만 머물러 있다면 행복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 행복한 상태를 열반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D1.91)라며 비판 했다.
선정의 상태는 행복한 상태임에 틀림 없다. 이전의 상태와 비교했을 때 행복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2선정의 상태라면 초선정의 사유와 숙고를 질병으로 보아 질병에서 해방된 상태로 보는 것이다.
질병은 괴로운 것이다. 질병은 불행한 것이다. 질병에서 벗어났을 때 행복을 느낄 것이다. 선정이 높아짐에 따라 이전 선정은 모두 질병과 같은 상태가 된다. 질병에서 벗어난 것이 행복이듯이, 선정이 높아질수록 더 높은 행복한 상태가 된다.
4선정에서는 행복도 사라지고 평온한 상태가 된다. 이 평온도 행복으로 본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러한 행복에 대하여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라거나, “열반은 행복과 같다고 알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선정에서 “행복은 열반이다.”라고 말한다면 현법열반, 즉 유사열반 또는 가짜열반이 되어 버린다. 자아에 기반한 것은 열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행복이 열반으로 ‘자각된다 (veditabba)’든가 또는 ‘알려진다’라고 말한다면 현법열반은 아닌 것이 된다.
느낌이 없는 것이 최상의 행복
사리뿟따 존자는 여덟 가지 선정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했고 행복은 열반으로 자각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상수멸정은 어떻게 설명했을까? 지각과 느낌마저 소멸된 상태에서 어떻게 행복을 지각하고 느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을 한다.
“벗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은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는 부서집니다. 벗이여, 이러한 이유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
사리뿟따 존자는 여덟 가지 선정뿐만 아니라 아홉 번째 선정이라고 볼 수 있는 상수멸정도 행복과 열반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상수멸이라면 지각과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전 여덟 가지 선정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상수멸에 대하여 열반과 동의어로 본다. 그러나 경에서는 동의어로 보지 않고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라고 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세간의 행복부터 출세간의 행복까지 행복을 말했다. 여기서 세간의 행복은 오욕락을 포함하여 여덟 가지 선정에 대한 것이다. 상수멸정은 제외된다. 그럼에도 상수멸정을 포함하여 아홉 가지 선정에 대해서 행복이라고 했다. 또한 열반과 같은 것으로 자각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각 선정단계는 열반과 유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를 해결 했을 때 일시적으로 성취감을 느낀다. 이런 것도 행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선정에서 앞 선정을 넘어 섰을 때 열반과 유사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열반은 아니다. 진정한 열반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를 상수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를 열반이라고 하지 않았다. 열반으로 자각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경의 제목을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Nibbānasukhasutta)’(A9.34)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했다면 아무런 지각도 느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행복이라고 하고 왜 열반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놀랍게도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니까야에는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니까야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것 많다. 사리뿟따 존자가 말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 말은 법구경에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Dhp.204)라는 말과 연계 된다. 느낌이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 즉 열반이 되는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열반은 지각도 없고 느낌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라면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다나 열반의 경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0)라고 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열반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각도 없고 느낌도 없는 상태는 경험한 적이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잠 자고 났을 때 체험했다. 낮에 깊은 잠에 들었을 때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졸음이 쏟아질 때가 있다. 대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때 수면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이런 경우 휴게소에서 잠을 자야 한다. 잠시 눈을 붙이는 것이다.
휴게소에서 자다 깨었을 때 당황스러웠다. 이전의 기억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나인 것은 자각되는데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차 안에 있는 자신은 발견되고 앞에 주차장이 보이긴 했지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몇 초 걸렸다.
낮에 잠깐 졸다가 깼을 때, 죽음보다 깊은 잠을 순간적으로 잤을 때 이전 상황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런 사실을 아는 마음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 이전의 마음이다.
휴게소 경험으로 본다면 분명히 나인 것을 자각하는 아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생각으로 언어로 아는 마음은 아니다. 의식이 돌아오기까지 그 짧은 순간의 마음이 지각도 소멸되고 느낌도 소멸된 소멸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가장 행복할 때가 있다. 그것은 막 잠들려고 할 때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에 나른할 때가 있는데 졸린 상태가 된다. 막 잠들려고 하는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를 맛보고자 잠을 청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것도 유사열반 아닐까?
사라짐의 행복
우다나 열반의 경에서는 없음으로 시작해서 없음으로 끝난다. 열반의 상태에 대해서 있음으로 말한다면 한정되어 버린다. 열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열반이 행복이다’라고 긍정적 언표로 말하는 것보다는 ‘열반은 괴로움의 종식이다’라고 부정적 언표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포괄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사성제를 설했을 것이다.
누군가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하는 것 보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와 닿는다. 누군가 행복을 말했을 때 그것은 즐거운 느낌을 말하는 것인데, 그 즐거운 느낌마저 사라져 버렸을 때, 즐거운 느낌마저 소멸되어 버렸을 때 이를 행복이라고 말하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초기경전을 보면 열반이라는 말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이 말 못지 않게 많이 등장하는 말이 적멸이다. 그래서 “갈애의 소멸, 사라짐, 적멸, 열반이다.”(M64)라는 정형구도 있다. 또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로서 청량한 적멸을 얻었네.”(M26)라는 게송도 있다. 적멸은 열반과 동의어인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라짐의 행복이라 할 것이다.
느낌이 없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열반의 행복이다. 열반은 지각도 느낌도 없어서 마치 블랙홀과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아무것도 없는 것도 없는 것, 영원의 블랙홀 같은 것이다. 이를 영원의 제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열반을 영원의 블랙홀, 영원의 제로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일상에서 어떻게 사띠할 것인가?
부처님이 단지 행복만을 말했다면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을 말했다. 이는 적멸이다.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괴로움의 종식이고 동시에 윤회의 종식이다. 이는 대상의 종식이기도 하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대상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열반의 조건 중의 하나에 대하여 “대상을 여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어떠한 대상이든지 의존하지 않고 비물질적이지만 대상을 붙잡는 느낌 등과는 달리 대상화시키지 않음으로써 대상도 여읜다.”(UdA.392)라고 했다.
살다보면 대상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최상일 것이다. 그러나 삶을 살다 보면 매혹적인 대상과 혐오적인 대상을 접하게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 늘 사띠 해야 함을 말한다.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밧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일상에서도 알아차려야 한다. 이는 ‘어떻게 사띠할 것인가?’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접해야 한다. 경전 읽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더 좋은 것은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순수에 대한 체험이 있을 것이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되었을 때 마음에 부담이 없다. 마음이 탐, 진, 치 등으로 오염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처럼 된다. 그러나 마음이 청정한 상태라면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일 것이다. 지각과 느낌이 없는 상태라면 최상일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니까야를 사띠의 기둥으로
사띠는 호흡을 기둥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띠의 기둥은 가르침이 될 수도 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사띠의 기둥으로 삼을 수도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경험한 것을 기둥으로 삼는 것이다.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있는 그대로 본다면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열반이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경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한다. 여기에 작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느낌과 지각이 소멸되었을 때 최상의 행복이 된다. 지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사리뿟따 존자는 열반이 행복이라고 했다. 열반은 느낄 수 없는 것임에도 행복이라고 한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니까야 밖에서 접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없는 말이다. 이런 말을 접했을 때 경전 읽는 맛이 난다. 니까야를 사띠의 기둥으로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2022-10-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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