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야 하는가?
세상에 누구를 믿어야 할까? 나이 들어 늙고 병들면 누구에게 의지 해야 할까? 배우자에게 의지해야 할까? 배우자가 죽으면 의지처가 사라질 것이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에게 의지해야 할까?
부모가 있다면 부모가 의지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고아가 된다. 배우자나 자식에게 기대해 보지만 자신이 하기 나름이다. 아무것도 해 주는 것이 받기만 하고자 할 때 그들이 관세음보살이 아닌 한 보호받기 힘들다.
결국 혼자 살아가야 한다. 함께 살고 있지만 홀로 가야 한다. 홀로 길을 가기에는 너무 벅차다. 때로 실망하고 좌절한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할까?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 가족이나 동료, 친구, 스승이 있어도 공허하다면 가르침을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나에게 의지처가 있다. 마음이 심란할 때 경전을 열어 보면 차분해진다. 머리맡에 있는 경전이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즉각 펴본다. 그렇다고 아무곳이나 열어보지 않는다. 띠로 구분해 놓은 곳을 펼친다. 처음부터 진도가 나가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믿고 의지할 스승이 없으면 경전에 의지하라."라고 했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이야말로 최대 의지처이다. 언제든지 달려 가면 받아 주는 어머니 같은 경전이다. 실의와 좌절에 빠졌을 때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 경전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황량할까?
경전이 있어서 안심이다. 경전이 있어서 다행이다. 먼 길을 떠난 나그네가 돌아갈 집이 있는 것과 같다. 언제든지 반갑게 맞이해 주는 일가친척과도 같다.
경전이 없다면 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경전이 없다면 이 세상을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 나에게 있어서 경전은 부모 같고, 배우자 같고, 자식 같고, 친척 같고, 친구 같다. 경전이 있어서 이 세상 살아 가는데 힘을 받는다.
경전이 없으면 방황할 것 같다. 경전이 없으면 남은 생을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경전이 있기에 살아간다. 나에게 있어서 경전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경전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삼보중의 하나로서 불보이다. 불보로서 가르침은 의지처이자 귀의처이다. 더 나아가 피난처이다.
가르침이 왜 피난처인가? 이는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고해의 바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열반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를 열반으로 이끈다. 가르침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부처님은 가르침만 섬으로 삼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신도 섬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고 했다.
부처님은 법귀의와 자귀의를 말씀하셨다. 법귀의는 알 것 같다. 그러나 자귀의는 알기 힘들다.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고, 자신을 피난처로 하라니! 도저히 자신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자귀의를 말씀하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귀의의 의미를 알았다. 경전을 보지 않았다면 평생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경전을 처음부터 읽어 보아야 한다. 필요한 부분만 읽어서는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알 수 없다. 부처님은 왜 자귀의하라고 했을까? 먼저 법구경 게송 하나를 들 수 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법구경에서는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다.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수호자가 되라고 한 것은 자귀의하라는 말과 같다. 자신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의지처로 하기 힘들다. 그래서 외부 대상에 의지한다. 그것은 신이 될수도 있고 부처가 될 수도 있다. 언제까지나 부처에게만 의지할 수 없다. 마치 아이가 성장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귀의와 함께 자귀의를 설했다.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의지할 수 없다. 장애를 갖지 않는 한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한다. 그래야 부모도 대견하게 생각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부처님에게 의지할 수 없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으면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윤회의 바다는 그 지지처인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그 바닥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스스로 거룩한 경지(阿羅漢果)인 섬을 만들어야 한다."(DhpA.I.255)라고 했다.
여기 수행자가 있다. 그가 수행하는 것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르침에 의지한다. 가르침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부처님이 갔던 그 길로 가야 한다. 궁극적으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비로서 자귀의가 된다. 자신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법귀의와 자귀의, 법등명과 자등명이 있다. 법에 의지하는 것은 알겠는데 자신을 의지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전에 답이 있다. 마치 숨어 있듯이 있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갖추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창피함을 알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정진을 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지혜를 갖추는 한,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수행승에 대하여 이제 근심이 없다. 그 수행승은 자신의 수호자로서 더 이상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A5.7)
이 경을 보면 왜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야 하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지혜를 갖추면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누구든지 믿음(saddhā), 부끄러움(hiri), 창피함(ottappa), 정진(vīriya), 지혜(paññā)가 있으면 자신을 수호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신을 의지처로 삼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전까지는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궁극의 경지, 열반을 체험하면 그 열반으로 주욱 나아가게 된다. 아무리 못잡아도 일곱생 이내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열반은 안전하기가 섬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가르침은 안전하기가 섬과 같은 것이다. 누구든지 섬과 같은 열반을 체험하면 자신을 섬으로 만들 수 있다. 자신이 섬이 되었다면 이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섬으로, 자신을 등불로 주욱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가르침을 섬으로, 가르침을 등불로 하고 있다. 마음이 심란할 때 경전을 잡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가르침이 의지처이고, 가르침이 귀의처이고, 가르침이 피난처이다.
가르침 없는 삶, 경전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경전은 평생 동반자이다. 배우자 보다 소중하고 자식보다 소중하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경전 밖에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경전에 의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섬으로 만들었을 때, 자신을 등불로 만들었을 때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님은 거센 흐름에 난파되지 않는 섬을 만들어야 하리.”(Dhp25)라고 했다.
섬을 만들어야 한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섬이다. 섬은 열반을 의미한다. 열반을 성취하면 그때부터는 자신을 의지처로 살아간다. 자신이 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2022-10-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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