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대장경처럼 보관 되는 글을 쓰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8. 08:20

대장경처럼 보관 되는 글을 쓰고자


또  하루가 시작됐다. 지금 시각은 4 39, 글쓰기 딱 좋은 시간이다. 에스엔에스를 열어 보지 않아야 한다. 자극 받을 수 있다. 대상이 있으면 마음은 일어나가 마련이다.

글쓰기에 앞서 경행과 암송과 행선을 했다. 자리에 누워 있으면 생각의 지배를 받는다. 생각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몸관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경행을 하다 보면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몸관찰하는 것이다.

경행으로 몸관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불쑥불쑥 생각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어제 불쾌했던 생각의 찌꺼기도 떠오른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문다. 이럴 때는 암송해야 한다.

경을 암송하면 잡념은 약화된다. 암송하다보면 잡념은 제압된다. 왜 그런가?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상에 두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대상을 접하면 마음이 일어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에스엔에스를 접하면 마음이 거기에 빠진다. 분노하는 글을 접하면 분노의 마음이 일어난다. 새벽에는 어떤 뉴스도 보지 말아야 한다. 새벽은 명경지수의 마음과 같아서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 볼 수 있다.

암송을 하고 나면 확실히 집중된다. 이 집중된 힘으로 경행을 하면 행선이 된다. 경행할 때는 분명하지 않으나 행선을 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발을 떼서 밀고 딛고 누르는 모든 동작을 알아차릴 수 있다.

행선할 때 의도도 알아차리고자 노력한다. 발을 들기 전에 들려고 하는 의도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들기 때문이다. 들려는 의도가 있어서 든 것이지만 집중이 약하면 이를 알아차릴 수 없다.

암송과 행선을 하면 최상의 마음이 된다. 지금 몇 시인지 모른다. 시간을 대충 짐작한다. 거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이럴 때 글을 써야 한다. 명경지수의 마음이 되었을 때 깊이가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쓸 때 하나의 원칙이 있다. 가족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아내의 요청이 있는 것이 큰 이유이다.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족이기주의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꼰대가 되기 쉽다. 자신이 어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식이야기를 넘어 손주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그렇다. 꼰대중의 꼰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글을 쓸 때 사진위주의 글은 피하고자 한다. 사진에 대한 묘사의 글이 되었을 때 자랑이기 쉽다. 마음이 외부의 대상으로 향해 있을 때 그 대상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허망하다. 사진 위주의 글이 그렇다.

저격하는 글은 쓰지 말아야 한다. 분노의 글쓰기가 이에 해당된다. 화풀이로 글 쓰는 사람이 있다. 분노의 대상에 대해서 내뱉듯이 쓰는 것이다. 욕을 하고 나면 어느 정도 스트레스는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노로 인하여 독이 생겨난다. 신체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꼭지에는 꿀이 있고, 뿌리에는 독이 있는 분노'라고 했을 것이다.

그제 일요일 담마와나선원 까티나법요식에서 들은 것이 있다.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 대한 것이다. 스님은 "수행에서 무상, , 무아가 드러나지 않으면 중단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쓰기도 일종의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성찰이 있는 글쓰기가 이에 해당된다. 자랑하는 글은 해당되지 않는다. 무상, , 무아 중에서 하나 정도는 드러나야 성찰이 있는 글쓰기가 된다.

매일 경전을 읽고 있다. 글쓰기를 생활화 하듯이 경전읽기를 생활화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머리맡에 있는 것이 좋다. 책은 가까이 있어야 쉽게 접할 수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읽는 맛이 난다. 왜 그럴까? 무상, ,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 , 아로 되어 있다면 어떨까? 읽는 맛이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무상, , 무아에 마음이 끌릴까?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매일 경전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무상, ,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데 무상, , 무아에 대한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글에도 생명이 있다. 글에 생명을 부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무상, , 무아가 드러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울림이 있다.

글을 쓸 때 원칙이 있다. 가족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가족의 사생활도 있지만 가족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사진위주의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 사진위주의 글쓰기는 자랑이기 쉽다. 남을 저격하는 글을 쓰지 않는다. 남도 해치고 자신도 해치는 글이 된다. 그러나 사회발전이나 개혁을 위한 글은 써도 된다.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부정적 언표가 있다면 긍적적 언표도 있다. 글을 쓸 때는 성찰하는 글을 써야 한다. 반성하고 뉘우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 또한 경전에 근거한 글을 써야 한다. 삼특상, 즉 무상, , 무아 중에서 하나는 드러나는 글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이 있고 울림이 있는 글이 된다.

 


지금시각은 5 40분이다. 글을 쓴지 한시간 되었다. 엄지로 친 것이다. 귀중한 시간에 썼다. 한번 쓴 글은 버리지 않는다. 시간이 실려 있는 생명과도 같은 글이다. 대장경처럼 보관 되는 글을 쓰고자 한다.

2022-11-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