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때 차 한잔과 명상
이 우울이 어디서 왔을까? 어제부터 우울이 심하게 왔다. 두 가지를 의심해 본다. 하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이다. 어제 페이스북에서 어떤 친구가 1029참사 사진을 올려 놓은 것이다.
병원 복도에 널려져 있는 흰 마대자루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으면 사체 치울 공간도 없었을까? 이런 상황임에도 영정도 없이 추모한다고 국민애도 기간을 정하고 이름도 모르는 분향소에서 꽃들을 바라보면서 연일 분향쑈를 하는 듯이 보이는 정의롭지 않은 리더에 대하여 분노가 치밀었다.
우울의 또 하나 원인은 아마도 문자 메시지인 것 같다. 은근하게 비난하는 메세지를 받았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전에도 그랬다. 이번이 세 번째이다. 이런 성향을 알고 있기에 그 사람의 마음을 달래 주는 쪽으로 답신을 보냈다.
우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잠을 잘 자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된다. 몸이 피곤하면 아무래도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일을 해도 진척이 없다. 일은 흥을 필요로 하는데 흥이 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무실에 명상공간이 있다. 매일 명상하겠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달 앉아 보지 못했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을까? 잠시 30분도 앉아 있을 수 없을까?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명상공간에 앉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유투브시대에 좌복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유투브 시청은 쉽고 방석에 앉는 것은 어렵다. 예전에 앉았던 기억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나도 한때 저 자리에 앉아 있었던 때가 있었다. 선원에서 배운 대로 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 수행은 쉽지 않다. 쉽게 나태해진다. 누가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애써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이다.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예전에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되살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사띠라고 한다. 바로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만 사띠가 아니라 수행에서 경험도 사띠인 것이다. 방석에 앉을 때는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어떻게 해야 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계절적으로 우울의 계절이기도 하다. 매년 11월이 되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샛노란 나뭇잎은 바람이 조금만 살랑거려도 힘없이 떨어진다. 오늘 오전 명학공원에서도 그랬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걸을 때 마음도 추락하는 것 같았다. 마음도 계절을 타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우울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유투브는 대안이 되지 않는다. 보아도 그만이고 안보아도 그만이다. 보면 시선을 빼앗아 간다. 특히 우울이 있을 때는 역효과가 난다.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 먼저 차를 마시기로 했다. 오후에는 자극적인 커피보다는 차가 나을 것 같다. 차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강한 향이 나는 차로 했다. 베트남 차 같다. 선물 받은 것이다. 맛과 향이 뛰어나다. 우울에는 좋을 것 같다.
우울이 있을 때는 무엇을 하든지 흥미가 없다. 자꾸 슬픈 생각이 든다. 지나간 과거가 떠오른다. 이럴 때는 생각을 차단해야 한다. 눈과 귀로는 유투브를 보지 않고 마음의 문으로는 명상을 하여 생각을 차단해야 한다. 모든 감각기관을 차단했을 때 우울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명상공간에 앉았다. 앉고 싶어서 앉은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앉았다. 차를 마시며 명상을 했다. 차의 맛과 향이 우울을 억압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눈을 감고 복부의 움직임을 따라가니 마음의 문으로 들어 오는 번뇌도 어느 정도 차단되는 것 같다. 이렇게 계속 있어야 한다.
차를 마시고 명상을 하자 어느 정도 기분이 전환 되었다. 서구에서 명상 바람이 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불교적 색채를 제거한 MBSR만으로도 효과를 본다고 하는데 확실히 맞는 것 같다. 명상공간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본 것이다.
눈을 감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는데 선정과 지혜에 대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계행다발의 품을 보면 계, 정, 혜 삼학에 대하여 똑 같은 내용이 무려 13개 경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것도 이십페이지나 되는 긴 길이의 내용이다. 그런데 지혜의 다발(혜학)을 보면 신통도 지혜에 속한다는 것이다. 천안통이나, 천이통, 숙명통 같은 것을 말한다. 최종적으로는 누진통이다.
신통이 혜학에 속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삼학에서 혜학은 팔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유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신통도 혜학에 속한다는 것이다. 혜학의 범위가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혜학은 정견과 정사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팔정도에서 정견과 정사유는 예비적인 혜학에 해당된다. 진정한 혜학은 십정도에서 나타난다. 십정도에서 앎(ñāṇa)과 해탈(vimutti)도 혜학에 해당된다.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팔정도를 넘어서 십정도에서 완성된다. 해탈에 이르러야 가르침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정도는 혜학, 계학, 정학, 혜학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혜학은 예비적인 것이고, 뒤의 혜학은 본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통은 어디에 속할까? 그것은 아마도 뒤의 혜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앎(ñāṇa)이다.
초기경전에서 앎을 뜻하는 냐나는 궁극적 지혜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계행다발의 품 13개 경전에서 보여지는 지혜의 다발이 이에 해당된다. 즉, 통찰에 대한 앎(지견),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에 대한 앎(의소성신), 다양한 신통에 대한 앎(육신통), 하늘귀에 대한 앎(천이통), 타자의 마음에 대한 앎(타심통), 전생의 삶의 기억에 대한 앎(숙명통), 하늘눈에 대한 앎(천안통), 번뇌의 부숨에 대한 궁극적인 앎(누진통)을 말한다. 모두 앎으로 끝난다. 냐나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혜온은 신통이 포함되어 있다. 신통의 지혜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삼매에 들어야 할 것이다. 사선정에 들어야 신통의 지혜가 열린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선정과 지혜에 대하여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을 것이다.
선정과 지혜는 함께 한다. 네 번째 선정이 있어야 신통이 있게 된다. 그래서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음은 계행의 바탕에서 선정과 지혜라는 양날개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불교에서의 깨달음과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글을 쓰면서 우울이 달아 났다. 차를 마시고 명상을 하는 과정에서 옅어졌다가 글쓰기에 몰두하면서 다른 상태가 된 것이다. 우울에는 차와 명상, 그리고 일하기가 특효약인 것 같다.
2022-11-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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