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실험해서 동일한 결과를 냈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17. 07:06

실험해서 동일한 결과를 냈다면


어제 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 정신적으로 발전하는 삶이다. 삶에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글쓰기도 삶의 결실에 해당된다. 그러나 글쓰기 보다 더 수승한 결실이 있다. 그것은 수행이다.

오늘 30분 앉아 있었다.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코웃음 칠 것이다. 그러나 어제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1보 전진 한 것이다. 어제는 20분 앉아 있었는데 오늘 30분 앉아 있어서 10분 늘어난 것이다.

재가의 삶을 살며 수행하기가 쉽지 앉다. 방석에 앉아 있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은 늘 들떠 있고 마음은 늘 감각대상에 가 있다. 선원에 들어가서 집중수행을 하지 않는 한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유혹을 피하기 힘들다.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 앉았다. 앉는 것도 생활화 해야 한다. 습관 들여야 한다. 마음은 자꾸 유투브에 가 있고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 가 있다. 방석에 앉기는 어렵고 인터넷에 접근하기는 쉽다.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 적극적 삶의 방식과 소극적 삶의 방식이다. 이를 능동적 삶의 방식과 수동적 삶의 방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수행은 적극적이고도 능동적 삶의 방식이다. 인터넷에 빠지는 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 삶의 방식이다. 전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고 후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은 적극적 삶의 방식이다. 2009년 한국명상원에서 처음 위빠사나 수행 했었다. 그때 한시간 좌선 시간이 있었다. 묘원 선생은 좌선 중에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방식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이말을 십년이 넘었는데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은 역설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다.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보고 있다. 망상이 일어나고 다리가 저려 온다. 그때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방식입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오늘 30분 좌선 했다. 더 할 수 있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멈추었다. 그런데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평상시 같으면 좌선을 시작한지 20분이 지나면 다리가 저려 온다. 머리 속에는 온갖 망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평좌한 다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이대로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실험을 했다. 나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똑같은 결과를 내었다. 이틀 연속으로 동일한 결과를 얻은 것이다. 마치 의사가 임상실험하여 동일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과 같다. 화학자가 실험하여 동일한 결과를 얻어낸 것 같다. 요리사가 조미료를 이용하여 동일한 맛을 내게 하는 것과 같다.

어느 것이든지 조건이 동일하면 동일한 결과를 가져 온다. 맥도날드 햄버거 맛이 전세계적으로 같은 것은 동일한 조건을 주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대학에서 배운대로, 메뉴얼대로 하는 것이다.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오늘 늦은 오후에 행선과 좌선 하고자 했다. 습관 들이려면 매일 30분 이상 해야 한다. 그냥 앉으면 안된다. 준비운동 없이 물에 들어 가는 것과 같다. 먼저 행선을 해야 한다.

사무실 명상공간에서 행선 했다. 불과 열 보도 안되는 작은 공간이다. 예상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되지 않으면 5분도 힘들다. 그래도 억지로 해봤다. 역시 속수무책이다. 요행을 바라고 앉아 보았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앉아 있는 동안 온갖 잡생각이 일어 났다. 잡념은 망상이 되었다. 5분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준비 되지 않은 사람을 앉게 하면 고문이나 다름 없다. 5분 앉아 있기도 힘들다. 10, 20, 30분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커진다. 다리저림 등 신체적 고통은 극에 달한다. 수행이 아니라 고행이 된다.

나에게 믿는 것이 있다. 여러 차례 시행해서 성공한 것이 있다. 그것은 행선이나 좌선에 임하기 전에 암송하는 것이다. 이미 효과를 여러번 보았기 때문에 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암송 전과 암송 후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경행하면서 암송을 했다. 요즘 늘 암송하는 빠다나경을 외웠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행선할 때 발이 착착 달라 붙는 것 같았다. 이전에 행선할 때와 전혀 다른 양상이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스스로 불가사의하게 여긴다.

행선이 잘 되면 알아차림이 선명하다. 한번 집중 되면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오로지 아는 마음만 있게 된다. 잡념이 치고 들어와도 금방 부서진다. 잡념이 망상으로 전개 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5분 행선하는 것도 지루 했는데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한정 행선만 할 수 없다. 행선을 20분 가량 하고 앉았다.

방석은 푹신한다. 방석은 엉덩이를 받치는 용도로만 활용 했다. 두 다리를 바닥에 밀착시키는 평좌를 했다. 바닥은 요가 매트리스이기 때문에 딱딱하지 않다. 바지가 당겨졌다. 헐렁한 법복이 좋지만 사무실에서는 여의치 않다. 너무 끼여서 발 저림 현상이 염려 되었다.

행선에서 집중되면 이 집중을 고스란히 좌선으로 가져 오기 쉽다.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좌선에서 집중은 좌선에서 벗어났을 때 깨진다. 행선에서 집중된 사띠는 좌선뿐만 아니라 입선, 와선 등 어디에든 적용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주석에 따르면 "경행 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했다.

행선에서 집중은 쉽지 않다. 발을 들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모든 동작을 알아차림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움직이는 대상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집중이 이루어지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고스란히 좌선으로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좌선은 순조로웠다. 행선에서 집중을 고스란히 가져 온 것이다. 이는 경에서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행선을 한 후에 좌선에 임하면 도움이 됨을 말한다.

이전에 앉아 있을 때는 5분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에 임하자 완전히 달라졌다. 5분이 아니라 10, 20, 30분을 앉아 있어도 한결 같았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것이다.

좌선할 때는 가장 강한 대상에 마음을 둔다. 호흡이 가장 강한 대상이다. 그래서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는 것이다. 기둥에 묶기 위해서는 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끈은 사띠와 같은 것이다.

마음은 한 곳에 묶어 두지 않으면 날뛴다. 마음은 송아지 같은 것이다. 어린 송아지는 묶어 놓지 않으면 천방지축 날 뛸 것이다. 송아지를 기둥에 묶어 놓으면 끈의 길이만큼 반경 내에서 풀을 뜯을 것이다.

마음은 송아지와도 같다. 마음은 제어하지 않으면 늘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그래서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면 밧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사띠는 밧줄같은 것이다.

밧줄이 느슨하면 송아지의 행동반경은 넓어진다. 송아지는 망아지처럼 뛰어 다닐 것이다. 사띠의 밧줄이 느슨하면 망상이 치고 들어오기 쉽다. 사띠의 밧줄을 조이면 망상이 발붙이지 못할 것이다.

좌선을 왜 하는 것일까? 인내력 테스트나 고행하자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즐거움과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한다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즐거움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좌선을 하는 것이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졌을 때, 몸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때 편안하고 안은한 상태가 된다. 계속 이런 상태에 있고 싶어 하고자 수행하는 것인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두 가지 실험을 했다. 하나는 암송하지 않고 행선과 좌선에 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패 했다. 행선할 때 집중 되지도 않아 지루 했다. 좌선할 때 역시 집중이 되지 않아 5분 앉아 있기 힘들었다.

또 하는 암송하고 수행에 임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어제 결과와 똑 같다. 언제까지라도 행선할 수 있고 언제까지라도 좌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암송효과는 대단하다. 암송 전과 암송 후는 천지차이가 난다. 암송하고 행선에 임하면 발이 착착 붙는 것 같다. 언제까지라도 행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에 적용하면 쉽게 집중상태가 된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의 밧줄로 꽁꽁 묶어 놓는 것 같다. 언제까지라도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두 가지 실험을 해서 집중하는 방법을 검증했다. 이런 방법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암송하면 집중이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석을 대면 쇳가루가 일어서는 것 같다. 몸과 마음 상태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한번, 두 번, 세 번, 여러 번 해서 동일한 결과를 산출해 낸다면 검증된 것이나 다름 없다. 암송을 하고 난 다음 행선과 좌선에 임했을 때 확실히 효과를 보았다. 좌선한다고 용 쓸 필요 없다. 쉽게 들어가는 문이 있다. 암송하고 난 다음 수행하는 것이다.

나도 수행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수행의 진척을 기대해도 될까? 분명한 사실은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만 알고 있는 비법으로 수행하면 틀림없이 효과를 본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2022-11-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