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18. 08:48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 되고자


눈 뜨니 아침이다. 오늘도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시작이 있으니 끝도 있을 것이다.

"
오늘 잠 들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유명한 말이다. 사람의 수명은 주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수명이 보장된 천상과는 다르다.

천상의 존재는 복과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 수명에 따라 천상의 등위가 설정되어 있다. 가장 낮은 천상은 인간의 백년이 하루에 해당된다.

불교적 세계관이 있다. 크게 욕계, 색계, 무색계이다. 나는 욕계에 살고 있다. 욕계에 살고 있어서 욕망으로 살아 간다. 오욕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나는 오취온의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다. 내가 괴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태어나 보니 괴로운 존재인 것이다.

인생은 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부터 설했다. 원인과 결과에서 결과부터 설한 것이다.

집성제와 고성제는 인과관계이다. 갈애로 인하여 태어남이 있는데, 태어나 보니 괴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본래 괴로운 존재인 것이다. 인과관계에서 결과를 먼저 설한 것이다.

부처님이 괴로움의 원인 보다는 괴로움의 결과를 먼저 설한 데는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가 괴로운 존재임을 인정해야 함을 말한다.

우리는 본래 괴로운 존재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먼저 설한 이유가 된다.

생고, 노고, 병고, 사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 온통 고통 뿐이다. 최종적으로 오취온고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는 오취온적 존재로 살다가 오취온적 존재로 태어난다. 욕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계에서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만들어 놓아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욕망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욕계를 탈출해야 한다. 욕망이라는 감옥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욕망의 세계를 혐오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닙비다(염오) 비라가(이욕) 니로다(소멸) 비뭇띠(해탈)"을 말씀 하셨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이다. 욕망의 세계를 싫어하여, 떠나고, 소멸하여, 해탈하라는 것이다.

 


여기 똥벌레가 있다. 똥벌레는 똥을 떠나 살 수 없다. 똥 벌레를 깨끗한 곳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될까? 기어이 똥구덩이로 향할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 또한 이와 같아서 욕망의 세계, 욕계를 향한다.

"
인생 별거 없다. 즐기며 살아라." 카톡방에서 본 것이다. 누군가 아름다운 이야기라 하며 공유해 놓은 글 속에 있는 말이다. 인생을 원타임으로 보는 것이다. 단멸론적 사고 방식이다.

"
태어난 것에 이유 없다." 명사가 이런 말 하는 것을 들었다. 우연발생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태어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그것이 업이 되어 태어남이 있게 된다.

인생이 원타임이라면 청정한 삶을 살 필요 없다.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살면 된다. "이 순간을 즐겨라. 지나가면 후회한다."라는 구호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진리는 경전 속에 있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일컬어지는 니까야에 있다.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와 같은 사부니까야에 진리가 있다. 또한 법구경, 수타니파타 등이 있는 쿳다까니까야에 진리가 있다.

매일 경전을 읽고 있다. 집에서는 머리맡에 두고 읽고 있고, 사무실에서는 가까이 두고 읽고 있다. 매일 조금씩 읽고 있다. 마치 병아리가 물 한모금 먹고 하늘 쳐다보듯이, 한페이지 읽고 숙고해 본다.

경전만 읽는 것은 아니다. 선물로 받은 책도 읽고 돈 주고 산 책도 읽고 있다. 조금씩 읽고 있다. 하루 한페이지씩 만 읽어도 일년이면 다 읽게 된다.

어제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삶의 결실은 무엇인가?

글쓰기는 눈에 보이는 삶의 결실이다. 일단 한번 써 놓으면 남는다.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어 하나의 글이 완성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감을 맛본다.

글이 길다고 한다. 그러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다. 두세시간 작성된 글을 이삼분에 보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이다. 어느 분은 잠자리에 들 때 편안한 마음으로 읽는다고 했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자가 경전을 비난한다. "읽어 보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어!"라는 말이 떠오른다.

책으로 내는 것도 삶의 결실이다. 그날그날 매일매일 작성된 글을 시기별로, 카테고리별로 모어서 책을 만드는 것이다. 출판하지 않는다. 피디에프(pdf)를 만들어 블로그에 올려 놓는다. 누군가 인연되는 사람이 다운 받아 갈 것이다.

확실한 삶의 결실은 종이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딱 두 권 만든다. 보관용이다. 현재 70권 만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만들지 알 수 없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될 것 같다. 책장에 책이 차곡차곡 채워질 때 삶의 결실을 보는 것 같다.

좌선시간 늘리는 것도 어제 보다 나은 삶이다. 어제 30분 했다면 오늘 40분 하는 것이다. 어제 한번 했다면 오늘 두 번 하는 것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되고자 한다. 책을 읽으면 진도가 나가듯이 어제 보다 나은 삶이 되고자 한다. 욕계를 탈출하기 위해서.


2022-11-18
담마다사 이병욱

 

'수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억지로 삼십분 앉아 있기  (0) 2022.11.28
암자와 같은 사무실에서  (0) 2022.11.24
내가 수행을 못하는 것은  (0) 2022.11.18
실험해서 동일한 결과를 냈다면  (1) 2022.11.17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0) 202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