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15. 18:49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지금 시각 오후 445, 방금 좌선을 끝냈다. 오래 하지 않았다. 30분이내로 끝냈다. 빨리 느낌을 쓰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만의 수행방법인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이렇게 해서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그동안 새벽에 주로 수행에 관한 글을 썼다. 새벽 세 시대에 잠을 깨면 할 일이 없다. 다시 잠을 청하면 꿈속을 헤메다 보낼 것이다. 그럴 때는 일단 일어난다. 일어나서 경행을 하는 것이다.

 

새벽에 깨면 정신은 맑다. 잠을 자고 나면 흙탕물이 가라앉듯 몸과 마음이 정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행이나 좌선을 하면 거저먹고 들어가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 같다.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경행을 하면 잘 서지지도 않고 비틀거리기도 한다. 육단계 행선을 시도해보지만 단계마다 알어차림이 명료하지 않다. 그럴 때는 암송을 해야 한다.

 

암송하면 하면 확실히 효과가 있다. 이는 수차례 시행하여 확인한 것이다. 꽤 긴 길이의 경을 암송하고 나면 달라진다. 몸과 마음이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집중이다.

 

암송하면 왜 집중이 생겨날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마음이 집중되지 않으면 기억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빠다나경 같은 경우 모두 25게송인데 1,800자가 넘는다. 천천히 뜻을 새기면서 암송하면 15분 가량 걸린다. 15분 동안에 몸과 마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잡념은 사라지고 아는 마음만 있게 되는 것 같다. 이 상태에서 경행을 하면 행선이 된다.

 

경행과 행선은 다르다. 경행은 가볍게 걷는 것을 말하고 행선은 단계별로 알아차리며 걷는 것을 말한다. 육단계 행선이라면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모든 동작을 면밀히 아는 것이다.

 

요즘 한가하다. 일감이 뚝 떨어졌다. 매일 의무적으로 하는 글쓰기, 그리고 책 읽기로 보낸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끝났을 때 시간이 무한정 남는 것 같다. 대개 유투브 시청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보면 남는 것이 없다.

 

유튜브는 보아도 그만이고 보지 않아도 그만이다. 유투브에서 전하는 것들은 알아도 좋은 것이고 몰라도 그만인 것이다. 단지 시간 때우기 식으로 보낸다면 너무 허망하고 허무한 것이다. 좌선을 하기로 했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았지만 요즘 앉아 있는 날은 거의 없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하루 최소한 30분은 앉아 있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잊어 버린다. 시간이 한가해도 앉아 있지 않는다. 오늘만은 앉기로 했다.

 

앉기 전에 경행을 했다. 막바로 앉으면 마치 준비운동없이 물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행선은 좌선에 임하기 전에 준비운동 하는 것과도 같고 몸풀기와도 같은 것이다.

 

일터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나태해지기 쉽다. 나에게 수행은 저 멀리 있는 것이나 같다. 수행은 수행처에서나 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좀처럼 앉기가 쉽지 않다. 마치 말을 물 먹이기 위하여 억지로 물로 끌고 가는 것 같다.

 

오전 3시 반에 억지로 경행했다. 집중이 거의 되지 않았다. 양탄자 위를 몇 번 왕복하다 자리에 앉았다. ‘앉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라며 막연한 마음을 가진 것이다. 예상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5분 앉아 있는 것도 힘들다. 번뇌망상이 죽 끓듯 했다.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새벽에 시도했었던 암송을 경행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새벽에 암송을 함으로 인하여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나른한 오후 시간대이다. 더구나 새벽과는 달리 수많은 정보가 입력되어서 몸과 마음이 혼탁해졌다. 과연 새벽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오후에 암송을 하면 새벽과 같은 효과를 틀림없이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한편 안돼면 어쩌지?”라며 걱정이 되었다. 일단 해 보기로 했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첫번째 게송을 암송하고 두번째 게송을 암송하자 변화가 일어났다. 암송을 시작하게 되면 집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집중하지 않고 어떻게 경을 암송할 수 있을까?

 

빠다나경 25게송을 빠알리 원문으로 암송을 마쳤다. 몸과 마음에 확실히 변화가 생겼다. 새벽에 암송했을 때와 똑 같은 것이다. 이제 이를 경행에 적용시키면 된다.

 

암송으로 얻은 집중을 행선에 적용했다. 암송하기 전과 딴판이다. 처음 경행 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상태가 되었다. 육단계 행선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단계별로 알아차림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일에 열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과 같고 공부에 몰두 하면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과 같다. 행선을 할 때 단계단계 알아차림이 유지될 때 지루하지 않다.

 

육단계 행선을 20여분 했다. 집중이 계속 유지 되었을 때 이를 좌선에 적용하면 효과적이다. 좌선한다고 아무 예비 수행 없이 털썩 자리에 앉는다면 번뇌망상으로 견뎌나지 못할 것이다.

 

행선으로 어느 정도 집중된 힘을 좌선에 적용하면 좌선에서도 집중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경전에서는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고 했다.

 

행선을 하면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이 정화된 상태가 된다. 그러나 행선 없이 막바로 좌선을 하게 되면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데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번뇌망상 때문에 5분을 넘기기 힘든 것 같다.

 

행선을 마치고 좌선을 했다. 이미 행선에서 집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선에서도 집중이 유지 된다. 막바로 자리에 앉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암송을 해서 얻은 집중으로 행선을 하고, 행선에서 얻은 집중으로 좌선을 했을 때 좌선은 할만하다.

 

좌선을 20분 이상 했다. 더 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만 두었다, 오늘은 오후에 암송-행선-좌선을 해도 새벽에 하는 것처럼 잘 먹혀 들어간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했다.

 

수행 초보자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2009년에 접했기 때문에 햇수로 13년째이지만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암송 공덕에 대한 것이다.

 

암송으로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암송하는 것이 단지 기억력 테스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선에 적용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을 최근에야 확인 했다. 오늘은 좌선에까지 확대했다. 그렇다면 암송의 효과는 나만 아는 것일까?

 

위빠사나 관련 수행서적을 여러 권 읽었다. 그 중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 ‘위빳사나 수행 28(한국빠알리성전협회)’, ‘마음의 지도(연방죽)’를 주로 읽었다. 이 중에서 찬먜 사야도의 법문집 위빳사나 수행 28이 가장 읽을 만 했다.

 

 

코로나 이전 20191월에 미얀마에 있었다. 그때 담마마마까 수행센터에서 2주간 단기 수행 했었다. 수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12일 선원투어를 했었다. 그때 찬먜 수행센터를 방문했었다.

 

찬먜에서 김재성 선생을 만났다. 김재성 선생은 회원들을 이끌고 수행중이었다. 김재성 선생은 좌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애명상을 한다고 했다. 반드시 자애명상을 하고 난 다음 본 수행에 임한다고 했다.

 

찬먜 사야도의 법문집에도 자애수행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왜 자애수행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위빠사나 수행만 하다 보면 날카로워지기 때문에 자애수행을 해서 보완하는 측면도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았다.

 

본수행에 앞서 자애수행하는 것은 예비수행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왜 그런가? 지애수행은 사마타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집중해 놓고 하는 것으로 본다.

 

찬먜에서는 자애수행을 매우 중시한다고 들었다. 자애수행을 하여 자애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예비수행으로서 자애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자애수행은 사마타이기 때문에 사마타를 먼저 한다음에 위빠사나 수행에 임하면 그 집중된 힘을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자애수행을 하면 초선정에 들 수 있다. 초선정은 사유(vitakka)와 숙고(vicara) 로 들어갈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비딱까에 대하여그것은 대상을 향해 마음을 떠오르게 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치고 두드리는 것을 기능으로 삼는다.”(Vism.4.88)라고 했다. 마치 종을 친 다음에 또 계속 치는 것을 비딱까(思惟)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위짜라에 대해서는종의 울림처럼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숙고이다.”라고 했다. 종을 치면 울림이 있는데 울림을 비짜라(熟考)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경을 암송하는 것은 종을 치는 것에 해당된다. 그런데 한번 종을 치면 울림이 있다는 것이다. 울림이 다하기 전에 다시 한번 종을 쳐 주어야 한다. 그래서 종을 치는 것이 사유이고, 계속 울림이 있는 것을 숙고라고 본 것이다.

 

경을 암송한다는 것은 마음의 종을 치는 것이다. 종을 치면 독특한 파장을 가진 울림이 있게 된다. 암송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하나의 파장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몸과 마음이 집중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애수행은 개념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는 언어화된 개념을 말한다. 그래서 사마타수행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마타 수행도 개념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빠다나경을 암송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에 대한 것이다. 경을 암송하는 것 자체가 언어화된 개념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다. 자연스럽게 집중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그것이 사유이고 숙고일 것이다.

 

수행은 사마타하자고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은 위빠사나를 하고자 수행하는 것이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지만 위빠사나는 궁극적 실재를 대상으로 한다. 지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몸과 마음에서는 수많은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물질적인 것도 있고, 느낌도 있고, 지각도 있고, 형성도 있고, 의식도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것이다. 이는 하나의 개념에 몰입하는 사마타와 다른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궁극적 실재는 각각 고유한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탐욕이나 분노는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탐욕은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거머쥐는 것을 특성으로 하고, 분노는 싫어하는 것에 대하여 밀쳐 내는 것을 특성으로 한다. 이와 같은 궁극적 실재를 빠라맛따담마라고 한다. 그런데 모든 궁극적 실재는 공통적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는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영속성이 없다. 궁극적 실재는 무상한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빠라맛따담마의 공통적 특징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오온에서 생멸하는 빠라맛따담마의 고유한 특성과 공통적인 특성을 보기 위한 것이다. 이런 특성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것도 집착할 것이 없다. 이런 사실을 통찰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자리에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마음은 늘 들 떠 있다. 세상에서 살다 보면 온갖 유혹으로 가득하다. 눈과 귀를 빼앗아 가는 것들로 가득하다. 유투브가 그렇고 에스엔에스가 그렇다.

 

오늘 명상공간에 앉아 보았다. 마치 말을 끌고 물가게 데려 가는 것처럼 앉기 싫은 것이다. 마음이 늘 들 뜬 상태이기 때문에 먼저 마음을 잡아야 했다. 이럴 때 암송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암송을 해서 암송한 힘으로 행선을 하고, 행선을 해서 행선으로 집중된 힘을 좌선에 적용한다면 마음이 가라 앉는다. 이제 집중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실행만 하면 된다.

 

 

2022-11-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