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30. 18:07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누구나 인간은 시간 앞에 평등하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주어진 시간은 같다.

잠 잘 때는 잠 자야 하고, 밥 먹을 때는 밥 먹어야 한다.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시간 앞에 동등하다. 일이 있건 없건 간에 주어진 시간은 같다.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렸을때는 시간이 잘 안갔다. 시간이 안가서 심심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 자신이 없었다. 인생을 살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존재하니까 사는 식이었다. 인생의 의미도 몰랐고 목적도 없었다. 해가 뜨면 살다가 배고프면 먹고 해가 지면 자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감각적 욕망의 세월을 산 것이다.

임플란트가 진행중에 있다. 보철물을 박았는데 두 달 가량 양생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그 기간에 사용할 의치를 주었다. 용도는 남을 만날 때 보기 싫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잠 잘 때는 빼고 자라고 한다. 넣다 뺐다 하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새 이를 받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치과에서 인생무상을 절감한다. 이를 때우기 단계를 지나면 씌우기 단계가 된다. 씌우기 다음 단계는 이식단계이다. 임플란트를 말한다. 갈데까지 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마 틀니가 될 것이다. 그 단계도 지나면 인생을 다 산 것이 된다.

임플란트를 하다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몸을 이끌고 살아갈 날이 불과 스무해 남짓 될 것 같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다. 누가 그렇게 오래 살도록 보장할 것인가? 최후의 날은 내년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오늘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진리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보험회사에서는 기대수명을 말하지만 기대수명까지 산다는 보장은 없다. 당장 한시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다. 오늘 새벽 용산 이태원에서 할로윈 축제 참사가 일어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오늘 최후의 날이 된다면 나는 만족할까?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잘못 산 것이다.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삶에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직장인은 월급을 받는 것을 결실로 한다. 프로페셔널로서 결실을 말한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책을 내는 것을 결실로 한다. 엔지니어는 개발하는 것을 결실로 한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자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스스로 재가수행자라고 말한다. 생업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생계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수행자로서도 삶을 살고자 한다. 이럴 때 본업은 어떤 것인가? 생업이 본업이 되고 수행이 부업이 될 수밖에 없다. 출가자라면 당연히 수행이 본업이  될 것이다.

출가수행자보다 더 수행자다운 재가수행자로 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현재 나의 수행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쓰기, 읽기, 외우기, 암송하기 위주이다. 이런것들도 수행이라 할 수 있을까?

수행의 또다른 말이 있다. 그것은 수습이다. 이는 습관 들이는 것을 말한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일이년이 아닌 십년이상 되었다면 프로페셔널이 된 것이다. 읽기와 외우기, 암송하기도 습관이 되어야 한다. 습관이 일상화 되었을 때 수행이 된다.

수행자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수행자는 아니다. 수행자에게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삶에 결실이 있듯이 수행의 결실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결실인가?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수행의 결실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탐, 진, 치를 소멸하는 수행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삶의 결실이 있다. 월급생활자처럼 눈에 보이는 결실도 있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은 수행승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결실에 해당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결실이 훨씬 더 많다. 계를 지키는 것, 감관을 수호하는 것, 선정에 드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결실에 해당된다.

수행자의 최후 결실은 어떤 것일까? 번뇌를 부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아라한 선언에 대해서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탁월한 결실"(D2)이라고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죽을지 모른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라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축복일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M131)

 


2022-10-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