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이빨
지금시각 4시 36분, 고요한 새벽이다. 대로변 아파트도 이 시각만큼은 조용하다. 가끔 자동차 지나가는 소음은 들리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대낮의 오토바이 소음에 비교하면 적막강산이나 다름없다.
암송을 하고 행선을 했다. 탐, 진, 치가 사라진것 같은 상태가 된다.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감각대상을 만나면 깨질 것이다. 그래서 사띠해야 한다. 일상에서 사띠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체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중 사띠와는 다른 것이다.
수행중 사띠는 마음챙김의 의미가 강하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띠의 번역어 마음챙김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상으로 넘어가면 들어 맞지 않는 것 같다. 일상에서는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서 대상과 마주쳐야 하는데 그때마다 좌선하듯이 마음챙김할 수 없는 것이다.
대상과 마주쳤을 때 불선법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마다 알아차려야 한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띠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새기고 있다면 버리고 없애는 삶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가지는 좋았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체험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될 것이다.
사띠는 기본적인 의미는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에서는 물론 일상에서도 기억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상에서 사띠가 더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늘 대상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눈이 있는 한 볼 수밖에 없고 귀가 있는 한 들을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불선법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사띠해야 한다. 이때 사띠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사띠는 좋았던 수행체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억을 뜻하는 새김이라는 번역어가 사띠의 본래 의미를 가장 잘 반영한 가장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새벽이 되면 좋은 생각이 샘솟는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붙잡아야 한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쓰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엄지로 치다 보니 자판으로 두드리는 것 못지 않다. 숙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새벽에 일없이 치다 보면 시간도 잘 간다.
이빨이 부러졌다. 어제 입안 느낌이 이상했다. 무엇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뱉어보니 이빨이었다. 오래전에 씌었던 것이 부러진 것이다. 썩은 이빨을 갈아낸 다음 그 위에 의치를 씌었는데 씌운 것이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빨을 보자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의치로 씌었을 때도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의치가 부러졌을 때 참담함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마치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가 수명이 다 되어서 털털 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즉시 치과로 향했다. 안양로 대로변에 다닌지 15년가량 되는 단골치과가 있다. 치과에서 수많은 이빨을 씌었다. 이빨을 씌울때 마다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몸이 하나하나 망가져 가는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못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뿐이었다.
부러진 이빨을 다시 살릴 수 없다. 다시 씌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임플란트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갈데까지 간 것 같다. 이빨 씌울 때도 비참한 기분이었는데 임플란트해야 된다는 말을 들으니 더 비참해지는 것 같다. 마치 신체가 폐물, 폐품이 된 것 같다.
임플란트를 하기로 했다. 두세달 걸릴 것이라고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신호탄이 될지 모른다. 이것을 신호로 줄줄이 갈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이빨을 씌어서 20년 살았다면 이제 임플란트해서 20년 살 것이라 생각하니 인생무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임플란트 문의 하면서 의사를 처음 보았다. 나이가 젊다. 40대 중후반 같다. 간호사에게 물어 보니 맞다고 한다. 그렇다면 15년 전에 치과에 처음 왔었을 때 30대 초반이었단 말인가? 그동안 누워서 눈감은 채 듣기만 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다.
이빨을 보면서 신체무상을 절감한다. 이빨이 썩어서 삭아 없어 졌을 때 삶도 끝날 것이다. 더이상 씹을 수 없을 때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잇몸으로 먹는 사람도 있다. 먹는 재미를 잃었을 때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 이빨이 부실해서 잇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상 죽은 목숨이라고 본다.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 오지말라는 보장은 없다. 앞으로 2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참담하고 비참하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이 젊음과 이 건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언젠가는 과일이 익어서 떨어지듯이 멈출날이 있을 것이다. 그 전조는 이빨이 삭는 것이다. 이빨이 삭아 의치를 해서 씌우고, 씌운 것이 부러졌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임플란트를 하게 된다. 그것마저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 인생도 끝날 것이다.
“밤과 낮은 지나가고
목숨은 다함이 있다.
작은 시내에 물이 마르듯,
사람의 목숨은 다해 버린다.”(S4.10, Thag.145)
“결국 익은 과일처럼
아침에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Stn.576)
“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작건 크건 구워졌건 구워지지 않았건
모두 깨어지고 마는 것과 같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진다.” (Stn.577)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시오.”(JA.IV.122)
죽음에 대한 게송이다. 초기경전 이곳저곳에 있는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어느날 "툭"하고 끊어지듯이 죽음이 우리를 덥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 있어야 할까?
보살은 출가했다. 부처님이 보살로 살았던 때를 말한다. 보살은 젊었을 때 출가했다. 보살은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고 출가 했다. 해가 뜨자 이슬이 증발해 버리는 것을 보고서 무상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나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풀잎이슬의 비유를 들어서 "어머니, 저의 출가를 막지 마십시오."라며 눈물로 말한 것이다.
초년에 인생무상을 느끼기는 힘들다. 젊을 때는 젊음의 교만으로 즐기기에 바쁘다. 나이가 들어 신체기관이 하나 둘 망가질 때 그제서야 인생무상을 실감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수행도 힘이 있을 때 해야 한다. 노년출가는 힘들다. 왜 노년출가가 어려운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A5.60)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와같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노년출가의 어려움에 대해서 얘기 했다.
출가는 젊었을 때 해야 한다. 그러나 상근기를 가진 자나 가능할 것이다.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다면 풀잎에 맺힌 이슬만 보고서도 출가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신체기관이 망가졌을 때, 그제서야 출가를 생각하게 된다.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출가자처럼 살고자 한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는 삶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늘 기억하는 삶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사띠해야 할 것이다. 가르침을 늘 새기며 살 때 슬픔은 덜할 것 같다.
2022-10-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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