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보여주기 위한 글은 쓰지 않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29. 08:17

보여주기 위한 글은 쓰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에 대한 근원의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것이다. 나는 작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한때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포기 했다. 한때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나는 블로거이다.

 

여당이 있으면 야당이 있기 마련이다.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글을 쓴다고 해서 모두 작가는 아니다. 주류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작가라고 칭할 수 있다. 등단이 좋은 예일 것이다.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쓰는 자,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류세력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주류에 속한 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글을 쓰기 때문에 나는 작가이다라고 선언했으나 이를 철회한다.

 

글을 쓴다고 해서 모두 작가가 아니고 시를 쓴다고 해서 모두 시인이 아니다. 주류에서 인정해 주어야 작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 그럼에도 글을 쓴다고 하여 작가이고 시를 쓴다고 시인이라고 한다면 당나귀와 같다.

 

청정도론에 반승반속(半僧半俗)에 대한 것이 있다. 출가자도 아니고 재가자도 아닌 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열세 가지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있다. 일곱 번째 항을 보면 수행승이라고 선언하더라도 수행승이 아니니, 마치 소들을 뒤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Vism.1.154)라고 했다.

 

당나귀는 소도 아니고 말도 아니다. 당나귀는 소의 무리에도 속하지도 않고 말의 무리에도 속하지도 않는다. 당나귀는 소와도 종이 다르고 말과도 종이 다른 것이다. 더구나 겉모습도 차이가 난다.

 

당나귀가 소의 무리 뒤를 따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소의 무리들이 소로서 인정해 주지 않지만 소의 무리를 졸졸 따라다닌다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도 아닌 것이 작가의 무리에 끼고자 한다면 소의 무리를 뒤따르는 당나귀와 같은 것이다.

 

어느 시대를 주류는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신분에 대한 차별은 있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주류에 편입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요즘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등용문을 통해서 주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아직까지 한번도 등용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아니 통과할 필요를 못 느꼈다. 왜 그런가? 나의 글쓰기는 생활속에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하다가 시간이 남으면 쓰는 것이다. 쓸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만들어서 쓴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터에 나온다.

 

고객사 담당들은 아침 아홉 시가 되면 출근한다. 그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시간은 글 쓰는 시간이다. 가능하면 아침에 일찍 나와야 한다. 아침 일곱 시에 일터에 오면 두 시간이 확보된다. 두 시간이면 글 하나 나올 시간이다.

 

글은 단번에 써내려 한다. 몇날몇일을 두고 쓰는 일은 없다. 한번 생각난 것에 대하여 쉼없이 밀어 부친다. 더구나 고객사 담당들 나올 시간에 맞추어 쓰다보니 속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일을 하다 보면 초분을 다툰다. 인쇄회로기판(PCB) 설계를 할 때 한편으로는 라우팅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검색해야 한다. 모니터 두 대를 풀 가동한다. 두 대의 모니터에는 이것 저것 잔뜩 떠 있다. 그런 한편 메일도 보내야 한다.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아야 한다. 마치 전투를 치루는 것 같다.

 

글을 쓸 때도 전투적으로 쓴다. 속도가 생명이다. 한정된 시간에 끝내려면 요란하게 자판을 두들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리 생각해 놓는 것이 좋다. 글을 어떻게 쓸 것인지 마음속으로 씨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글쓰기는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자극 받은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주제를 정해서 글을 쓰라고 했다. 이 말에 대하여 하나의 책을 쓰라는 말로 받아 들여 졌다. 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댓글로 달았다.

 

 

초기경전, 니까에 실려 있는 담마를 주제로 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작가는 아닙니다. 생활속에서 틈틈이 쓰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편 씁니다. 글은 한편으로 완성됩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과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달고 날자와 서명을 합니다. 글에 대한 무한책임 입니다.

일종의 수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경전문구나 게송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매일 쓰다 보니 많아 졌습니다. 이를 카테고리 별로 묶으면 책이 됩니다. 물론 전문작가들은 인정하지 않겠지요.

책은 출간 하지 않습니다. 딱 두 권만 인쇄-제본 합니다. 보관용 입니다. 만든 책은 pdf로 변환하여 블로그에 올려 놓습니다. 인연 있는 사람들이 다운 받아 가겠죠. 이런 글쓰기에 대해서 스스로 비주류, B, 3류 글쓰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주류편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가 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는 말과 같다.

 

나의 길은 어떤 길인가? 그것은 불교를 주제로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지 않는다. 누가 보건 말건 나의 길을 가면 된다.

 

 

세상의 유희나 오락이나 감각적 쾌락에

만족을 구하지도 말고 관심을 두지도 말고

꾸밈을 여의고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59)

 

 

숫따니빠따 무소의 뿔의 경’(Sn.1.3)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무소는 뿔이 하나이다. 그리고 덩치가 매우 크다. 커다란 몸집에 외뿔이 달린 코뿔소는 오로지 한길로 앞으로만 간다. 수행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에스엔에스를 보면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한부류는 글로 보여 주려는 사람이고 또 한부류는 사진으로 보여 주려는 사람이다. 누군가 사진을 올렸다면 이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여행이 되었건 먹방이 되었건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본다면 사진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 준다. 또한 여러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만 보여 준다. 수많은 사진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 공개한다. 심지어 포토샵처리도 한다. 이런 사진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진은 진실이기도 하지만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또한 사진은 폭력이기도 하다.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글은 어떠한가?

 

글도 사진과 마찬가지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진과 정반대이다. 사진은 외부를 대상으로 하여 외부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글은 자신의 내부를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면을 밝히는 글에서는 사진이 별로 없다.

 

에스엔에스에서 사진으로 승부하려는 사람이 있다. 반드시 사진을 곁들이는 사람을 말한다. 심지어 자신의 얼굴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아마 비주얼에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에 스님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사진은 진실이다. 그런 한편 사진은 폭력이다. 글도 진실이고 또한 폭력이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차이는 있다. 사진은 감각적이고 글은 내면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잘 만든 콘텐츠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콘텐츠로 승부하고자 한다. 매일매일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 만약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글을 쓴다면 보여주기 식의 글이 될 것이다. 소의 무리를 뒤따르는 당나귀가 되기 쉽다.

 

이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각자 얼굴모습이 다르듯이 각자 성향도 다르다. 나의 불교에 관한 글쓰기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류가 되고자 한다면 소의 무리를 뒤따르는 당나귀가 되기 쉽다. 나는 나의 길을 가야 한다. 소의 무리를 뒤따르는 당나귀가 되기 보다는 우직하게 한길로 가는 코뿔소가 되고 싶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등용문에도 통과하지 않았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글을 쓴다.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다. 항상 비주류, B, 3류임을 잊지 않는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블로거이다. 보여주기 위한 글은 쓰지 않는다.

 

 

2022-09-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