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영원한 저 세상과 자아가 있다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21. 10:48

영원한 저 세상과 자아가 있다는데

 

 

불교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의심의 여지 없이 스님과 학자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은 수행을 전문으로 하고 학자는 학문을 전문으로 한다. 수행과 교학에 있어서 스님과 학자를 따라 갈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글을 보기 힘들다.

 

스님과 학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 등 커뮤니티에서는 그들을 볼 수 없다. 페이스북, 카톡방, 밴드 등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도 그들의 글을 볼 수 없다. 그들은 글을 쓰지 않는 것일 것? 그들은 쓸 줄 모르는 것일까?

 

이 글은 보통불자에 지나지 않는다. 최고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행경력이 깊은 것도 아니다. 매일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니 글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다. 2006년 이후 지금까지 쓴 글은 6천개가 넘는다. 나는 왜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것일 것일까?

 

나에게 글쓰기는 일상이다. 밥 먹는 것과 똑같다. 하루 해가 뜨면 으레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무언가를 하나 써야 한다. 오늘 아침 대변을 누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글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요즘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고자 한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한줄 읽고 생각하고, 또 한줄 읽고 생각하다 보니 진도는 더디다. 그러나 어느 날 끈으로 가름해 놓은 것을 보면 진도가 나갔음을 확인하게 된다. 마치 지식이 하나하나 쌓여져 가는 것 같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은 것 같다.

 

디가니까야 1번경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을 읽고 있다. 이를 하느님의 그물의 경이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 유행했던 온갖 사상에 대하여 정리해 놓은 것이다. 육사외도의 사상이 주된 것이다. 이를 경에서는 망설이라고 했는데 모두 62가지 사견이 있다.

 

사견은 정견과 반대되는 말이다. 사성제를 정견이라고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정견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은 모두 사견이 될 것이다.

 

경을 보면 놀랍게도 오늘날 종교에 대한 것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유일신교에 해당되는 영원주의가 그것이다. 특히 부분적 영원주의와 부분적 비영원주의를 보면 틀림 없다.

 

 

창조주도 외로움을?

창조주도 외로움을 느낄까? 텅 빈 세상에 홀로 화생한 자가 있다. 성주괴공하는 우주에서 성겁기에 해당된다. 그는 색계 천상에서 계속 강등되어서 수명이 고작 1겁에 해당되는 색계초선천에 화생하게 되었다.

 

그는 홀로 있다 보니 외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D1.39)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생각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어떤 중생이 화생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계속 중생들이 화생하게 됨에 따라 그는 창조주로서 추앙 받았다.

 

그는 어떻게 창조주가 되었을까? 이는 경에서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39)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경에서 하느님으로 번역된 말은 빠알리어 브라흐마(Brahma)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 고대 인도에서 창조주이자 유일신 개념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ahamasm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D1.39)라고 표현되어 있다. 오늘날 유일신 개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서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서 다녔다. 중학교는 불교학교를 다녔다. 먼저 불교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저항이 컸다. 학교에서는 매주 두 번 방송예배가 있었고, 매달 한번 운동장에서 오전 내내 전체 예배가 있었다. 일년에 한번은 3일동안 수업을 전폐하고 교회에 가 있었다. 이처럼 혹독하게 기독교를 겪었다.

 

교목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했다. 성경시간에 번호순으로 돌아가면서 기도하게 되었는데 어느 학생은 들은 대로 하나님 아버지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내 차례가 돌아올까 조마조마했다.

 

교탁에 불려 나가 도저히 하나님 아버지하며 기도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사고가 터졌다. 내 앞 번호 어느 학생이 교탁에 나가 다같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한 후 침묵을 지키다가 아멘하고 내려와 버린 것이다.

 

모두 교목을 쳐다 보았다.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교목이 혼내켰다면 그 학생은반발했을 것이다. 그 학생은 불교신자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교목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교탁에 불려나가 기도하는 일은 없어졌다. 내 번호 앞에서 끊긴 것이다.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마도 산동네 교회에 나간 것이 이유가 된 것 같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날 교회에 갔었다. 교회에 가면 빵을 준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동네 달동네 아이들은 그날 하루만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서는 빵을 주었다. 그리고 찬송가를 가르쳐 주었다. 찬송가 중에는 유황불이 들어가는 것도 있었다. 하나님을 믿다가 믿지 않으면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어렸을 적 경험은 평생 가는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가혹한 선교정책에 희생양이 되었다. 끝까지 저항한 것은 불교학교를 먼저 들어 간 것도 있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영혼이 털릴 것 같았다. 더구나 믿다가 믿지 않으면 유황불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랜 세월 종교를 멀리 했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 정신적 방황을 한 것이 큰 이유가 된다. 끊임 없이 저항했다.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도 있다. 한번 영혼을 빼앗기면 나의 힘으로는 찾아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교목이 설교할 때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부정했다.

 

정신적으로 방황하자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60명 중에 50등대였으니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것이다. 그때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할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전학도 생각했었다. 농촌의 농업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고등학교 1학년을 방황 속에 보내다가 고등학교 2학년을 맞이 했다. 그때 당시 우반과 열반이 있었는데 당연하게 열반으로 떨어졌다. 우열반은 2학년 봄에 없어졌다. 두 달 존속했던 것 같다. 아마 정부정책에 따라 폐지 되었을 것이다.

 

더 이상 방황할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 들여만 했다. 전학을 갈 수 없었다. 하루 빨리 세월이 가서 졸업해야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학입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남은 기간 동안 매진해도 될까말까한 상황이었다. 1학년을 허송세월 했으니 3년 중에 일년을 허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종교는 종교이고 학업은 학업이다. 학교에서는 거의 매일 예배가 있고 찬송이 울려 퍼졌다. 마음 속으로는 계속 저항했지만 1학년 때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대학입시 공부에 매진하기로 했다. 2학년 겨울방학 때 종로에 있는 학원을 다니면서 독서실에서 밤늦게 공부한 것이 효과를 보았다.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좀더 좋은 결과를 냈을 것이다.

 

디가니까야를 접하고

 

미션스쿨에 배정 받지 않고 일반학교에 배정 받았더라면 정신적 방황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학업에 전념 했을 것이다. 이런 아픈 기억이 있어서일까 고등학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회도 나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종교를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이가 불혹이 되었을 때이다. 집과 직장만 왕래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자 그 해법을 종교에서 찾고자 했다. 불교에서 찾고자 했다. 그래서 2004년 불교교양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불교를 접하고 수년이 지난 후에 초기불교를 접했다. 자연스럽게 니까야를 읽게되었다. 디가니까야를 처음 열어 보았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1번경인 브라흐마잘라경에 고등학교 다닐 때 그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미션스쿨에서의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었다.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라 윤회하는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디가니까야를 접한지 10년가량 되었다. 디가니까야 1번경인 브라흐마잘라경을 접할 때마다 미션스쿨에서 무서운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이 생각났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하는 순간 영혼이 탈탈 털릴 것 같았다. 용케도 잘 참아 내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성적이 최하위권으로 맴돌며 방황했다. 이렇게 된 것은 정부정책이 잘못된 것이다. 고등학교 선택권을 주어야 했다. 이른바 뺑뺑이로 뽑힌 세 번째 케이스에 해당되었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들어 왔으니 당연히 학교 방침대로 종교교육을 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맞지 않는 학생은 3년이 지옥같았을 것이다. 졸업을 하고서야 예배와 찬송에서 벗어났다. 한동안 아니 거의 30년 가까이 어느 종교도 멀리한 이유가 된다.

 

이 세상과 저 세상

 

경에서는 영원주의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영원주의이고 또 하나는 부분적 영원주의와 부분적 비영원주의이다. 앞서 소개한 것은 후자에 대한 것이다.

 

왜 부분적 영원주의와 부분적 비영원주의라고 하는가? 이는 그런데 어떤 뭇삶은 그 무리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오는 경우가 있다.”(D1.39)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말한다.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어떤 중생은 수행자가 되어서 삼매를 닦았다. 전생을 보는 능력도 생겼다. 그런데 그는 바로 이전 전생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전 생을 보니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보는 눈의 차이가 생겼다. 저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고,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 세상인 것이다.

 

수행자는 숙명통으로 이전 세상을 회상한다. 그는 이전 세상에 대하여 우리를 창조한 이 존귀한 하느님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여 전변하는 것이 없이 영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D1.39)라고 보는 것이다. 창조주가 있는 저 세상은 영원이 존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부분적 영원주의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수행자는 이 세상을 돌아 보게 된다. 이는 경에서 그러나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 온 것이다.”(D1.39)라고 되어 있다. 이 세상은 생노병사가 있는 유한한 세계인 것이다. 이를 부분적 비영원주의라고 했다.

 

니까야를 보면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제까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모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창세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놀랍게도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도 오늘날 유일신교 창세기와 매우 유사하다. 창조주가 있는 저 세상은 영원한 것이고, 생노병사가 있는 이 세상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은 영원한 것이고 반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이를 경에서는 부분적 영원주의와 부분적 비영원주의라고 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기를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니까야를 보면 다양한 가르침이 있는데 그 중에는 사상투쟁에 대한 것도 적지 않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에 유행하던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사상과 싸웠던 것이다. 브라흐마잘라경에서는 영원주의, 유한무한론, 회의주의, 사후유지각론, 사후무지각론, 사후비유미무지각론, 현세열반론이 소개 되어 있다. 숫자로 따지면 모두 62가지가 된다. 이를 62견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견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를 망설(adhivuttipadani)”이라고 했다.

 

니까야를 보면 수많은 외도의 가르침이 소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외도의 이론을 연기법으로 부순다. 어느 사상이든지 연기법으로 부수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영원주의는 현상의 소멸을 관찰함으로서 부서지고, 허무주의는 현상의 생성을 관찰함으로서 부서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견에 대한 고찰을 보면 오늘날 선불교에서 말하는 진아에 대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진아도 영원주의 범주에 해당된다. 이는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D1.34)라는 견해를 말한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말한다. 이를 정상론으로도 설명한다. 산봉우리는 하나인데 올라 가는 길은 여럿이라는 것이. 진리는 같은 것인데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길희성 선생은 야훼, 하느님, 브라흐마, 진아, 상제 등과 같은 말은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는 같은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열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자들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하나라고 말한다. 다만 이름이 달리 불리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모든 종교는 하나로 통한다고 말한다. 진제스님이 뉴욕 교회에서 부모미생전본래면목으로 법문했을 때 기립박수 받은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브라흐마잘라경에 따라면 진아는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다. 그런 진아는 마음이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한다. 그래서 그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전변하는 것이 없어서 항구적으로 그대로 존속할 것이다.”(D1.42)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여기 이 세상에서 자아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자아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아서 전변하는 것이다.”(D1.42)라고 했다. 앞의 자아는 진아에 대한 것이고, 뒤의 자아는 가아에 대한 것이다.

 

영원주의에서 창주조와 피조물의 관계가 있다. 또한 영원주의에서 진아와 가아와의 관계가 있다. 경에 따르면 두 관계는 부분적 영원주의와 부분적 비영원주의와의 관계를 말한다. 전자는 영원한 것이고, 후자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후자는 항상 전자를 동경한다. 영원주의에 대한 동경을 말한다.

 

경에서는 놀랍게도 경에서는 창주조와 피조물의 관계와 진아와 가아와의 관계를 똑같이 보았다. 그래서일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영원주의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길희성이나 오강남 선생 등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하나님과 진아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지위도 학위도 없는 보통불자이다. 지위가 없다는 것은 스님이나 학자와 같은 지위가 없음을 말한다. 학위가 없다는 것은 피에치디와 같은 최고 학위가 없음을 말한다. 매일매일 블로그에 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는 블로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글은 스님이나 학자들이 보기에 인터넷 잡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글은 스님의 법문이 될 수 없고, 학자의 논문이 될 수 없다.

 

오늘 글을 쓰다 보니 기성 종교에 대한 비판 글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정 종교나 종파에 대하여 폄하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쓰다 보니 비판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Reality)에 대한 것이 브라흐마잘라경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왜 정상론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왜 진제스님이 뉴욕 교회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글은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보통불자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2022-10-21

담다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