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발을 어떻게 씻었을까?
발로써 발을 씻는다. 이 말을 접했을 때 유년기 농촌에 살 때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날 농부가 논도랑에서 발 씻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농부는 담배를 피면서 발로 발을 씻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발을 다른 한쪽 발로 쓱쓱 씻어내는 것이었다. 발가락 사이의 진흙까지 남김없이 씻어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았다. 처음 본 것이었을까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농부는 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발을 씻었다. 오늘날 현대화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설령 농촌에 산다고 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논에 들어가 김을 메고 나올 때 뻘과 같은 흙이 잔뜩 묻었을 때 콸콸 흐르는 도랑에서 발로 발을 씻는 모습을 이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전에서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존자 고따마시여, 손이 다른 손에 씻겨지고 발이 다른 발에 의해서 씻겨지는 것과 같이, 지혜는 계행에 의해 씻겨지고, 계행은 지혜에 의해서 씻겨집니다. 계행이 있는 곳에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계행이 있습니다."(D4)
디가니까야 쏘나단다의 경에 실려 있는 말이다.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계행과 지혜 가운데 한가지만 들어서 '나는 바라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묻자 바라문 쏘나단다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의 말을 추인해 주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 수행자들은 맨발로 다녔다. 때로 진흙길로도 갔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발을 씻었다. 이는 율장 대품에서도 확인된다.
율장 대품에 오비구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오비구를 찾아가는 장면을 말한다. 그때 발 씻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오비구는 부처님의 위의에 압도 되었다. 이는 "어떤 자는 자리를 펴주고, 어떤 자는 발 씻을 물을 준비했다."(Vin.I.9)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오비구 중의 한명이 발 씻을 물을 대야에 떠서 가져왔다. 부처님은 발을 어떻게 씻었을까? 누군가 씻겨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율장 대품 10장 꼬삼비의 다발을 보면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두 발을 씻었다."(Vin.I.351, M128)라고 되어 있다. 그때 부처님은 손을 사용해서 씻었을까? 아니면 발을 발로써 씻었을까?
발을 발로써 씻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충 쓱쓱 씻으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섬세하게 씻을 수 있다. 발가락 사이에 있는 진흙까지도 발가락을 이용하여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도 발을 씻을 때는 발을 발로서 씻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발이 다른 발에 의해서 씻겨지는 것과 같이"라고 말하며 추인해 준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라문은 부처님 당시 최상위 계층이었다. 그래서인지 바라문은 자만이 있었다. 경전에서는 이를 태생적 자만이라고 설명한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는 우월적 자만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바라문들은 대체로 거만했다.
바라문들은 부처님의 승단을 경멸하기 일쑤였다. 승단에는 바라문, 왕족, 평민뿐만 아니라 노예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승단에서는 사성계급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대했다. 바라문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태생적 자만에 대한 것이었다.
바라문들은 심오한 교리 체계가 부족했다. 바라문의 여러 특징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계행과 지혜에 대한 것이다. 계행과 지혜는 상호의존적이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라문 쏘나난다는 바라문의 계행과 지혜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계행과 삼매와 지혜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이른바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계, 정, 혜 삼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디가니까야 제1품 계행의 다발 13개 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큰 이유가 된다. 무려 20페이지 걸쳐서 설명되어 있다. 그것도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런 설명을 듣자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된다.
바라문은 태생적 자만을 가졌다. 그들은 외모, 성전, 출생, 계행, 지혜를 소중하게 여겼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중에서 두 가지, 즉 계행과 지혜만 있으면 '이것이 바라문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삼학을 말했다. 바라문에게 없는 삼매의 다발이 추가된 것이다.
바라문에게 계행과 지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손으로 손을 씻고, 발로써 발을 씻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바라문은 그가 최상이라고 여기는 계행과 지혜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는 부처님이 "바라문이여, 그 계행이란 무엇입니까? 그 지혜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바라문은 자신의 한계를 밝히며 계행과 지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처님은 매우 길게 계행과 지혜를 설명했는데 바라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삼매를 추가했다.
디가니까야에서는 무려 13개 경에 걸쳐서 삼학이 설명되어 있다. 무려 20페이지 걸쳐서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있다. 이는 계, 정, 혜 삼학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혜학의 다발을 보니 사대에 대한 관찰도 혜학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깟싸빠여, 그 수행승은 이렇게 마음이 삼매에 들어 청정해지고 고결해지고 티끌없이 오염을 여의어 유연해지고 유능해지고 확립되고 흔들림 없게 되어. 앎과 봄으로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여, '이 몸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지고, 부모에서 생겨나고, 밥과 죽으로 키워지는 이 몸은 무상하고,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지고, 부수어지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이 의식은 여기에 의존하고 묶여 있다.'라고 분명히 압니다."(D8)
사대관찰은 통찰에 대한 앎(지)과 봄(견)에 대한 것이다. 삼매를 바탕으로 한 냐나(지)와 닷사나(견)을 말한다. 삼매에 들어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우리 몸은 사대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것이다. 이는 바라문교의 창조설과 다른 것이다.
경에서 이 몸은 무상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식은 몸에 묶여 있다고 했다. 몸과 의식은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도 무상한 것이다. 오온이 무상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깟싸빠여, 이것은 수행승의 지혜의 완성입니다."(D8)라고 했다.
사대 관찰도 지혜의 다발에 포함되는 것임을 알았다. 더구나 지혜의 완성이라고 했다. 사대 관찰하는 것이 이후 설명되는 신통과 동일하게 지혜의 완성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빠사나 수행 제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도 그것 자체로서 지혜의 완성에 해당됨을 말한다. 삼매에 들어 있는 그대로 앎과 봄에 의한 통찰이 생겼을 때 지혜의 완성으로 본 것이다.
매일 새벽 행선을 한다. 잠을 자고 난 다음 행선을 하면 효과적이다.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행선을 하면 잘된다. 여기에다 암송까지 하고 행선에 임하면 알아차림은 더 선명해진다. 이때 마음 집중은 순간삼매에 해당된다. 움직이는 몸과 마음을 대상을 한 것이다.
행선으로 사대를 관찰할 수 있다. 발을 바닥에 디뎠을 때 딱딱함이 느껴지면 지대가 관찰된다. 발을 밀어 이동할 때 경쾌함은 풍대에 대한 것이다. 몸에서 뜨겁거나 차가운 기운이 감지될 때는 화대에 대한 것이다. 몸이 응집되어 있음을 하는 것은 수대에 대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아는 마음은 의식에 해당된다.
행선을 하면 순간삼매로 인하여 사대를 관찰할 수 있다. 사대관찰은 지혜의 다발에 해당된다. 그런데 바라문들에게는 사대관찰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천안통, 천이통, 숙명통, 누진통에 대한 것도 없었다. 오늘날 어떤 종교에서도 불교의 혜학과 관련된 것은 볼 수 없다.
바라문들은 계행과 지혜를 강조했다. 두발로 씻듯이 서로가 서로를 씻어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학이 없었다. 정학은 불교에만 있다. 물론 유사 삼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처럼 감각기관의 문을 단속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네 가지 선정에 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지혜의 다발에서 누진통으로 번뇌를 부수어 해탈과 열반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외도들에게서 볼 수 없다.
바라문들은 계행과 지혜는 상호의존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는 삼매와 지혜가 상호의존적이라고 했다. 이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계행은 기본에 해당된다. 어느 전통에서도 계행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종교 전통에서 볼 수 없는 것은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삼학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디가니까야 제1품 계행의 다발 13개 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수많은 종교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이든지 체계적이지 못하다. 어느 종교이든지 교리에 헛점이 있고 결여 되어 있고 모순이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런 점을 지적했다.
바라문교는 오늘날 유일신교 종교와 유사하다. 영원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도 똑같다. 바라문교도 헛점과 결여와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체계화된 계, 정, 혜 삼학으로 가르침을 설명했다. 그러자 바라문은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으로 시작되는 귀의문을 말하면서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유년시절 농촌에서 발을 발로써 씻는 것을 보았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발을 씻은 것이다. 맨발로 다니지 않는 현대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유년시절 분명히 보았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발씻는 장면이 있다. 부처님은 발을 어떻게 씻었을까? 두 손을 이용해서 씻었을까? 두 발로 씻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2022-11-09
담마다사 이병욱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야심경과 입법계품의 모티브가 되는 께밧다의 경(D11) (0) | 2022.11.23 |
---|---|
어떻게 우연론자가 되는가? 무상유정천과 무심도인 (0) | 2022.11.20 |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을까? (0) | 2022.10.29 |
영원한 저 세상과 자아가 있다는데 (0) | 2022.10.21 |
큰스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0) | 2022.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