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떻게 우연론자가 되는가? 무상유정천과 무심도인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20. 08:29

어떻게 우연론자가 되는가? 무상유정천과 무심도인


지금 시각은 오전 7시이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동녘은 밝다. 하늘과 구름과 도시의 조화가 신비롭다. 이른 아침이 되면 늘 새로운 기분이다.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할까? 아침부터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는 등의 소극적 행위는 허망한 것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 아침에는 정신이 맑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머리맡에 디가니까야를 읽고 있다. 19번경 뽓따빠다의 경을 읽었다. 이전에도 읽은 적이 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아마 완전히 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 없이 경전만 읽는 다면 겉핳기 식이 되기 쉽다.

뽓따빠다의 경은 심오하다. 모르기 때문에 심오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선정체험과 관련된 것이다. 선정체험이 없으니 심오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석을 소개한 각주를 통하여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디가니까야는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는 경이 긴 길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서 웅대한 소설적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인물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유행자 뽓따빠다가 있다. 외도 유행자를 말한다. 그는 싸밧티 시에 있는 공개토론장에 있었다. 공개토론장은 공원에 있었다.

공개토론장에는 수많은 외도들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시끄럽게 왁자지껄 큰 소리로 떠들며 여러 가지 잡담”을 하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 제자들과 대조적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침묵했다.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침묵을 유지했는데 이를 고귀한 침묵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명상 주제를 하나 선정하여 선정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귀한 침묵이라고 한다.

외도들은 아침부터 공개토론장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었다.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경에 따르면 왕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등 이십여가지에 달한다.

외도들은 왜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한마디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이 없기 때문에 잡담을 하며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 것이다. 오늘날 노인들이 정치이야기 등을 하며 할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연상된다.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없으면 잡담하며 떠들며 보내기 쉽다. 일이 없으면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TV시청이나 유튜브 보기, 에스엔에스 하기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니 식사가 대사가 되고 더 나아가 술 마시는 것으로 세월을 보낸다.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유행자들의 공개토론장에 부처님이 나타났다. 부처님은 탁발 가기 전에 공개토론장을 먼저 들러보고자 한 것이다. 그때 유행자 뽓따빠다가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무리들에게 훈계 했다.

뽓따빠다는 부처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벗들이여, 조용히 하라.”라며 말했다. 부처님이 고요한 것을 좋아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고요한 대중인 것을 알면, 생각건대 우리와 가까이 할 것이다.”(D9)라고 말한 것이다.

뽓따빠다의 경을 보면 심리묘사가 뛰어나다. 마치 소설을 보는 것 같다. 주석을 보면 더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유행자 뽓따빠다가 조용히 하라고 한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우리는 수행자 고따마 출현한 이래 해가 뜬 뒤의 개똥벌레처럼 되었다. 우리는 이득도 상실했다. 만약 이곳에 수행자 고따마나 고따마의 제자나 혹은 그의 제자가 온다면, 너무나도 부끄러운 것이다.”(Smv.367)


외도들은 부처님을 부를 때 고따마라고 불렀다. 성씨를 부른 것이다. 오늘날 한국이라면 “박씨” 또는 “감가”라고 불렀을 것이다. 외도이기 때문에 성씨를 부르는 것이다. 부처님 제자나 재가신도라면 ‘바가와’로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 세존을 말한다.

부처님은 외도 뽓따빠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다 중단 되었는지 물어 보았다. 이에 뽓따빠다는 지각의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지각은 어떻게 소멸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외도들은 네 가지 지각의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지각은 원인없이 조건없이 일어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무상유정천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 4선천에 무상유정천의 존재(asaññasatta)가 있다. 이들은 지각이 없는 존재이다. 마치 목각인형과도 같고 청동으로 만든 동상과도 같은 존재이다. 지각이 없기 때문에 죽은 듯이 사는 것이다. 마치 기절한 자와 같다. 마치 식물인간과도 같다. 몸은 있지만 의식이 없는 존재를 말한다.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들은 왜 지각없이 태어났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보고 ‘무심의 상태가 적정이다.’라고 성취를 닦아서 여기서 죽어서 오백겁의 사이에 지각이 없는 존재로 있다가 여기에 태어난다.”(Smv.369)라고 설명했다.

무심도인이 있다. 선가에서는 최상의 경지로 여기는 것 같다. 아무 생각이 없는 존재라고 오해 받기 쉬울 것 같다. 무심이라면 마음이 없는 존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존재를 말한다. 이런 존재라면 니까야에서 말하는 지각이 없는 존재 무상유정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무상유정천의 존재는 마음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홀연히 일어나는 분노를 보고서 마음이 모든 번뇌의 원인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탐욕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무심, 마음이 없는 상태가 열반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무심도인은 마음이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분별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에는 마음이 만악의 근원이고 마음이 번뇌의 근원이 된다고 하여 무심의 상태가 되고자 했다. 그 수행의 결과 색계 무상유정천에 태어나게 되는데 생과 사를 거꾸로 사는 것과 같다.


무상유정천의 존재는 살아 있으나 지각이 없기 때문에 무심의 상태가 된다. 기절한 상태 또는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명이 다 되어서 죽을 때 비로서 지각이 생겨난다. 죽어야만 의식이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행자 뽓따빠다는 “그것이 일어날 때 지각하는 자가 되고, 그것이 소멸할 때에 지각을 여읜 자가 됩니다.”(D9)라고 말했다.

생과 사를 거꾸로 사는 듯한 존재에게서 이 세상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우연론이 되기 쉽다. 우연론자는 자아와 세계는 우연히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디가니까야 1번경 브라흐마잘라경에서는 우연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을 여읜 뭇삶(중생)이라는 이름의 신들이 있는데, 그런데 지각이 생겨나면 그들은 신들의 무리에서 죽는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어떤 뭇삶은 그 무리에서 죽어서 여기에 오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와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정근하고 수행하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 마음의 삼매를 경험하여 지각이 생겨나는 것을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자아와 세계는 우연히 생겨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내가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은 현존의 상태로 전변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D1.63)


디가니까야 1번 경에서는 무상유정천의 존재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무상유정천의 존재가 죽으면 지각이 생겨나는데 이에 대하여 ‘자아와 세계는 우연히 생겨난다.’라는 삿된 견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수행을 하여 전생을 보긴 했지만 바로 이전 전생만 보았기 때문이다.

우연론자는 바로 이전 전생에서는 지각없이, 의식없이 살았다. 무심으로 산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네 번째 선정을 일으키고, 선정에 들어 오염을 본다. ‘마음이 있으면 손의 절단 등의 괴로움이 모든 두려움을 생겨나게 한다. 이러한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무심의 상태에 적정이 있다.’라고. 이러한 마음의 오염을 보고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갖추면, 죽은 뒤에 지각을 여읜 뭇삶들(無想有情, asaññasatta) 가운데 태어난다.”(Smv.118)


무상유정천의 존재는 생과 사를 거꾸로 사는 존재와도 같다. 마음 쓰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아 무심의 상태가 되고자 한다. 따라서 무심이 되고자 하는 수행을 했을 때 지각이 없는 존재 즉, 무상유정의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무상유정천의 존재가 수명이 다되어서 죽으면 그제서야 지각이 생겨난다. 지각이 생겨 났을 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자아와 세상이 생겨난다고 보기 때문에 우연론자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우연론은 사견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뽓따빠다에게“원인과 더불어 조건과 더불어 인간에게 지각이 일어나고 또한 소멸하기 때문입니다.”(D9)라고 말했다. 어떤 것이든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발생함을 말한다. 이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우연론을 논파했다.


2022-11-20
담마다사 이병욱